아름다운 약속 순결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마더 테레사 서문/ 최재훈 옮김
머리말
년 전 우리는 이 책의 초판을 냈다. 그 후로 이
책은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가장 큰 반
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마도 이 책은 사람들의 어떤 민
감한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의 메시
지가 '현실(reality)'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
고, 다른 독자는 이 책의 내용이 자신의 수용 범위를 넘
어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책이 제시하는 분명한, 그렇지만 동시에 온
정어린 길잡이에 감사를 표시했다.
저자는 새롭게 확충된 이번 판에서 좀더 폭 넓은 주
제들을 충실히 다루기 위해 독자들의 제안을 수렴하고
일화를 보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의 책
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
이 책의 내용을 뛰어 넘어 자신들이 발견한 통찰력을 일
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책 말미에 학습교재를 첨부
해 놓았다.
과거 이 책이 불러일으킨 반향을 볼 때, 이번 개정판
역시 더 많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토론을 촉발
시키리라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은 우리 시대 많은 사람
들이 관심을 가질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
나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약속을 전해줄 것
이다.
최근 한 독자가 우리 공동체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저의 과거 모든 관계들은 완전히 실패였습니다. 왜냐
하면 그 관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섹스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무엇이 참된 관계이며 무엇이 참된
결혼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제게 주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와 동일한 경험이 있기를 소망한다.
1998년 7월
편집부
나의 충실한 아내 베레나에게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을 교황께 전해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
다. 교황께서도 교회 일치를 위한 이와 같은 행동을 매
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내용이 그
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공통된 신앙으로부터 흘러나온
도덕적인 신념과 조화를 이룬 것으로 인해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사실 그러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증오와 심
지어 박해를 야기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예
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려는 노
력을 그분과 함께 쉼 없이 해야만 합니다.
1995년 라찡거(Ratzinger) 추기경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례
서문
우리는 이 책에서 오늘날 이 세상 모든 곳에서 필
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순결하게 되는 것,
그리고 순결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하
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할 만큼 그분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순결을 우
리가 지켜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언제나 공급해 주십니다. 순결은 기도의 열매입니
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들은 일치와 순결을 지킬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 각자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를 사랑할
것입니다. 순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그
릇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일치와 연합이 있
고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1995년11 월
인도 캘커타에서 마더 테레사
들어가는 말
오늘날 도처에서 사람들은 영구적이며 의미 있는
관계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 여전히 로맨스의 신
화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은 넘쳐 나고 있으며, 신세대 젊
은 남녀들은 성적인 자유가 만족의 열쇠라는 믿음을 버
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사람들은 그런 성의
혁명을 필사적으로 믿기 원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
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다. 자유를 가져오리라 기대했던 성의 혁명은 수
많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고립시키고 상처를 주었다. 우
리를 둘러 싼 엄청난 고통에 직면해서 우리 모두는, 젊
은이나 늙은이 할 것 없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선택
한 삶의 방향을 되짚어 보고 우리가 과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21 세기에 접어들어 세상은 결혼과 남녀 관계에 관
한 신구약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상실해 버렸다. 우리
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창조 질서에 반기를 들었으며,
우리의 반역을 인간적인 논리로 합리화시켜왔다. 우리
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성령의 목소리를 경멸했
다. 그러나 그런 우리는 자유와 만족 그 어느 것도 발견
하지 못했다.
나는 목회자로서 지난 수십 년 간 아주 많은 미혼자
들과 기혼자들을 상담해 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성적인
영역에서 기쁨이 아니라 좌절과 혼란 그리고 심지어 절
망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마음과 영혼으
로 일치되길 갈구한다. 그러나 로맨틱한 사랑이란 관념
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알아보지 못
하고 있다. 그들도 물론 결혼과 성적인 결합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안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그리고 가장 이룰만한 가치가 있
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왜 그런 관
계가 자신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외로
움과 고통의 원천이 되어 왔는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
고 있다.
나는 사회학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최근 연구
들에서 뭔가 분명하게 밝혀진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문
화가 수용해 온 자유분방한 성생활(casual sex)이 죽
음의 낙진처럼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
실일 것이다. 미국에서만 결혼한 부부의 반 이상이 실패
로 끝나고 있다. 자녀들의 거의 40%가 친아버지와 떨
어져 다른 집에서 살고 있다. 가난, 폭력 범죄, 청소년
비행, 무분별한 성 관계,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 정신
질환, 자살, 이 모든 것들은 가정이 붕괴되고 결혼이 파
괴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반면 결혼 때까지 성적인 순결을 지킨 사람들은 (그
숫자가 차츰 감소하고 있긴 하지만) 외도나 이혼을 하
는 사례가 훨씬 적다. 그리고 평생 한 명의 배우자에게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은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대의 추세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는 추세에
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사람들이 점점 싸
구려 성 관계가 선사하는 짜릿함과 헌신 없는 사랑이 가
져오는 허울뿐인 만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X세대' 안에서도 마찬가
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젊은이들 사이에 참된 관계와 안
정된 가정에 대한 열망이 증가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기꺼이 드릴 때 자신이
처한 불행에서 벗어날 길을 발견했던 수많은 사례들을
보아 왔다. 일단 우리가 회개하라고 부르시는 그의 부르
심 앞에 용기를 갖고 겸손히 설 때, 예수님은 변함없는
자유와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혁명을 가져오신다. 예수님은 사랑
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의 가르침은 체면을 중시하지도 응석을 받아 주지도 않
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순결을 주시는데, 그 순결은 우리를 죄
에서 해방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과 같은 문화 속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새로운 생명이 성장하고 보호되기가 정말 어
려운 상황이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인 결
혼과 건강한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
지만, 그런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행
동을 취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
을 사회의 나쁜 영향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
렇다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과연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의 플러그
를 뽑고 자신의 결혼과 여러 관계들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 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또 우리 주위에
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는 형제자매들
을 구체적으로 돕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있는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 속에 있는 죄에 대
항해 전력으로 싸우고 있는가?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말한 것을 진정으로 책임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얼마
나 큰 고통이 있는지 모른다. 깨어진 가족, 매 맞는 아
내, 방치되고 학대받는 아이들, 죄악된 관계들. 하지만
예언자적 외침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무관심만이 가득
하다. 우리는 언제쯤 정신을 차리고 이런 무관심이 우리
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 삶을 나누
는 헌신된 사람들의 살아있는 몸으로서의 교회를 회복
해야 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먼저 시작해
야 하며, 그런 다음에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바른 사귐과 인생의
목표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선 먼
저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부부들을 꾸준한 관심으로 도와주어야 한
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비틀거리고 넘어졌을 때
회복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며, 또한 우리 자신이 넘어
졌을 때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독특한 가르
침이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
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내게 된 이유이다. 나는 성경학자도 전문 치료사도 아니
다. 그리고 이 책 내용 대부분이 요즘 인기 있는 지식과
너무도 대치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과 순결, 그리고 헌
신적인 삶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확신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절실히 느껴왔다
이 책은 나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책이 아니다. 이것
은 내가 속해있는 교회 공동체, 브루더호프의 삶에서 나
온 책이다. 그리고 내가 기록한 모든 내용에서 나는 우
리 공동체 식구들의 일치된 뜻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 즉 우
리 시대를 사는 모든 남성들과 여성들이 이제는 멈추어
서서 성과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순결한 삶의 가능성
을 너무 쉽게 단념해 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성
적인 '해방'의 신화를 추종하다가 부닥치는 좌절감과 허
탈감을 안은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관계가
실패로 끝났을 때, 자신들의 실패를 교묘히 발뺌하려 든
다. 이처럼 그들은 순결이 얼마나 엄청난 선물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름
다운 관계와 영원한 사랑을 향한 열망이 있다고 믿는다.
정말로 다른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기 훈련
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삶은 가능하다. 성실한 교회,
즉 참되고 정직한 관계 안에서 살기로 헌신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는 곳에는 그곳이 어느 곳이든 간에 모든 사
람과 모든 결혼을 위해 필요한 도움과 희망이 존재한다.
이 책이 독자 한 분 한 분께 그런 믿음을 선사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1998년 6 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1부
태초에
제1장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
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스리게 하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
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 : 26 -28
창조 이야기가 시작되는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인
간, 곧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
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하고 땅을 돌보라고 명
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주심을 드러내시면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이 시작되
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
이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
님의 계획을 발견한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 이야기를 하나의
신화로 간단히 취급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에 대한 아주 엄격한 문자적 해석만이 유효하다고 주장
한다. 하지만 나는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한 경
외심을 갖고 대한다. 그 말씀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신학
적으로 파헤쳐서 빼버릴 수 없으며, 과학자들이 경고한
대로 성경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지나치게 문자적으
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이다. (벧후 3:8)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구별되게 한다.
정확히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하나님만이
그 베일을 벗길 수 있는 신비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없이는 삶
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창조 이야기를 무시해버
릴 것이 아니라, 그것의 참된 의미를 찾고 오늘날 우리
에게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타락한 시대에는 창세기에 묘사된 하
나님의 계획을 경외감으로 대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보
기 어렵다. 창조의 의미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
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인 남자와 여자의 중요
성을 더 이상 아무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나머지
창조물과 특별하게 구별 짓고, 모든 인간 하나하나의 삶
을 성스럽게 한다(창 9:6). 그러기에 이처럼 사람을 하
나님께서 보는 방식이 아니라 단지 유용성이란 측면에
서 보는 것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경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
미할까? 이 말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또한 생명
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그분의 사역을 진전시키는 동역
자(co-worker)가 된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그 분께 속해 있으며 우리의 존재, 우리의 실존이 그분
과 항상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의 권위 아래 있어야만 된
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
님과 분리시키는 순간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목적을 상실
하게 된다.
창세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령(living spirit)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
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
령이 된지라"(창 2 :7).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
(spirit)을 주심으로, 사랑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자
유를 가진 책임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생령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형상(image)일 따름이다. 그러므
로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창조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참된 위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근원임을 부인하는 인
간,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살아있는 실재임을 부인하
는 인간은 끝없는 공허감 속에서 곧 길을 잃어버릴 것
이다. 결국 그는 자신을 우상화하는 덫에 걸려 결과적으
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치를 경멸하는 결과를 낳
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무언가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의 호흡을 불어넣지 않으
셨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이 되었을까? 다윈의 진화론은
그 자체가 위험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 중심에 하
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인간이 아
무 목적도 없는 우주 속에서 저절로 부화되었다는 이론
에 대해 소리쳐 거부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의
영혼 속 저 깊은 곳에는 영속적이며 불멸하는 것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영
원하시기 때문에, 생명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연기처
럼 그냥 자취를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에 뿌
리를 내리고 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 842-1919, 독일의 목사, 저술가, 종교사
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은 영혼의 자취,
곧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자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덧없음 속에 함
몰되어 버리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자
신에게로, 영원한 것에로 부르십니다."2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eternity)을 심어 두
셨다. 그래서 우리 각 사람 속 깊은 곳에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부인하고 그저 현재만을
위해 살 때,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고통스런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며 깊은 불만족으로 신음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이런 현상은 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
다. 자유분방한 성생활(Casual Sex)은 영원한 것을 향
한 갈망으로 가득 찬 영혼에 대한 모독이다. 어떤 사람
도, 어떤 인간적인 합의도 우리 영혼의 그 같은 갈망을
채울 수 없었다.
영원의 목소리는 우리의 양심에 대고 가장 직접적으
로 말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아마도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자리일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따라
우리에게 경고하고 일깨우고 명령한다(롬 2 :14-16 ).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질 때마다, 양심은 고통스
럽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양심의 목소
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목소리는 우리를 인도할 것이
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우리 양심은 비
틀거리며 길을 잃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 뿐 아니라 부
부도 마찬가지다.
이미 창세기 2 장에는 결혼의 중요성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
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남자가 홀로 있는 것
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남자의 돕는 배
필과 배우자(partner)로서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을 드러내는 그림으로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하
는 것 그리고 그분 안에서 둘이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
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함께
결합함으로써 각자 혼자서는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
는 것이다.
거대한 산들, 광대한 대양들, 강들, 광활하게 펼쳐진
물줄기들, 폭풍, 천둥, 번개, 거대한 빙산, 목초지, 꽃,
나무, 풀 등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준다. 거기
에는 힘과 사나움과 남자다움이 있으면서도, 온화함과
어머니다움과 섬세함 또한 있다. 자연 속의 다양한 생명
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
녀들인 남자와 여자 또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
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참된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될 때 삶의 관계들은 목
적을 상실한다.
오늘날 대다수 사회 속에서 남녀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왜곡되어 가는 현상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와 함께 순결
하고 자연스런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어가고 있다. 여성
평등에 관한 토론은 끝이 없지만 현실 속의 여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폭력과 착취를 당하고 있다. 영화, 텔
레비전, 잡지, 광고 속에 그려지는 이상적인 여성과 남성은
단지 성적인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요즘 사람들은 결혼을 더 이상 성스
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을 실험이나 계약으로
취급하며 모든 것을 이익여부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결혼
이 실패하더라도 서로 책임 없이 쉽게 이혼을 선택할 수 있
으며, 이혼 뒤에는 새로운 동반자와 새로운 결혼을 시도한
다.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정절의 서약으로 서로 구속하
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그냥 함께 살다가 헤어지면 그만이
다. 자녀를 낳아 키우거나 한 남자와 결혼해서 계속 사는 여
자들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는 행복한 결혼을 꾸려
가는 여자들조차도 남성의 지배로부터 '구출'되어야 할 억
압의 희생자로 간주되다.
오늘날 아이들은 더 이상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 창세기
에서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 짐으로 여기며 낙
태란 합법화된 수단으로 회피해버린다. 사람들은 자녀들을
귀찮은 존재로 본다. 자녀들을 세상에 낳아 양육하고 대학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
다. 아이들은 우리의 물질중심적인 삶에 경제적 부담을 초
래하며, 돌보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우리 시대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사는 것일까? 또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치 않는
사랑의 가능성을 단념해 버리고 말았을까? 생명이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생명은 싸구려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
람들은 생명을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지 않는다.
생명 공학과 태아 감별 기술의 진보는 이기적인 이유로 낙
태를 선택하는 부부의 숫자를 증가시켜 놓았다. 그러나 하
나님 없는 삶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그분과의 단
절로 인한 어두움과 깊은 상처만이 있다.
많은 개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
늘날 이런 상황과의 접전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있다. 무엇
보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
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왜 하나님께서 애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까?"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
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남자, 여자, 어린이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임무를 성취
하길 기대하신다. 온 피조물과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경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깊은 내적인 필요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시편 7:14-16 ).
우리 시대의 물질만능주의는 삶에서 도덕적인 목적과
영적인 목적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또한 우리가 경외심과
놀라움을 갖고 세상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며, 우리의 참된
임무를 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소비향락풍조로 야기된 영혼
과 정신의 질병은 우리의 양심을 아주 깊숙이 좀먹어 들어
간다. 그리고 더 이상 선과 악을 선명하게 비춰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렇지만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여전
히 선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생
명과 사랑과 자비를 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믿을 때, 우리는
치유를 발견할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
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
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가장 분명하고도 최종적으로 나타난다(골 1 :15). 하나
님의 완전한 형상으로서 그리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일치, 기쁨과
충족을 가져 다 주신다. 오직 그분 안에서 살아 갈 때 우
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운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운명이란 우리
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며, 창조적이며 생명을 주
는 사랑의 영으로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제2장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
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
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
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
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 :18, 21 -23
외로움만큼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방에 감금된 죄수들은 거미를 보고도
기뻐 어쩔 줄 모른다고 한다. 거미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적인 존재
로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끔찍할
정도로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 기술적인 진보는 삶의 많
은 영역에서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했다. 점차적으로 기
술은 사람을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노인들은 양로원에 수용되고, 공장 노동자들은 최첨
단 로봇에게 밀려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헤매지만 자포자기하여 그만 절망의 나락으로 떨
어진다. 어떤 사람은 정신치료사나 정신과 의사의 도움
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과 마약, 자
살에서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사
람에게서 단절된 채 많은 사람들이 깊은 자포자기 상태
에 빠져들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단절된 삶은 이렇듯 하나님이 뜻하신
연합을 파괴하며 결국 절망으로 이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절망은 자기애(self-love)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절망은 한 인간이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
하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고의로 등을 돌리지
만 결국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린 것을 발견함으
로써 썩어 냄새나는 '쾌락'을 맛보게 될 때 경험하
는 것이다.
절망은 교만이 발전한 궁극적인 결과이다. 인
간이 목이 곧을 대로 곧아 교만이 극에 달해서 하
나님이 전해주시는 행복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다는 것과 우리 인간은 스스로 운
명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보다
는 끔찍하고 비참한 저주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
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절망할 수 없다. 겸손
한 자에게는 더 이상 자기 연민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3
여기서 우리는 교만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겸손은 그 반대로 사랑으로 이끈다. 사
랑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그
리고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생명을 향하여,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여 '예'라
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만이 인간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고 다
른 사람을 위하여 살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 안에 그 분을 더 가까이 닮아 가
려는 본능적인 갈망을 심어 놓으셨다. 이 갈망은 우리를 사
랑과 공동체와 일치를 향해 가도록 재촉한다. 예수님은 마
지막 기도에서 이 갈망의 중요성을 지적하신다. "아버지께
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
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
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 7:21 ).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
든 사람이 서로에게 '너(thou)'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창 4:8-10).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공동체를 발견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 돕기 원하신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가장 깊은 마음과
만날 때, 의심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왜
냐하면 그런 우리의 도움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형제를 사랑
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
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 우리의 삶
은 사랑이 불을 밝히고 증명되고 결실을 맺을 때만이 충만
해 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
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두 가지 중요한 명령
을 하셨다. 이 두 명령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해야
만 한다. 다른 사람을 경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없다(요일 4:19-21 ).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반
드시 우리의 형제자매를 통해 있다. 그리고 결혼 안에서는
우리의 배우자를 통해 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결코 외롭
거나 장기간 움츠려 있을 수 없다. 즉, 우리는 항상 사랑해
야 할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그들을 찾
는 것이다. 최근 우리 공동체의 한 젊은 형제는 다른 사람에
게 다가설 때 그가 발견했던 새로운 기쁨을 내게 말해 주었
다. 그 형제는 한동안 볼티모어(Baltimore)에 머무르며 불
우 이웃을 위한 주택 건설 사업에 자원 봉사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
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
랐다.
저는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자신을 발견했
습니다. 삶에 대한 열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도시 빈민 어린이들을 위한 야학 프로그램을 소
개해 주었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애타게 도움을 찾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은 매일 밤 그곳에 나가 아이들을 돕고 있는데, 삶에 대한
제 관점이 어떻게 이렇게 완전히 바뀌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제게 얼마나 필
요한 일인지 전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대개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
을 사랑할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사랑
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거듭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돕는 형제자매가 되어야만 한
다. 이런 사랑을 위해 우리의 굳어버린 마음을 회복시켜 달
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리고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겸
손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
듯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돕고 의지하고, 보완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여자를 남자에게 그리고 남자를 여자에게
데려오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셨을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분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러
므로 우리 모두는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기쁨과 사랑 안
에서 서로를 발견해야만 한다.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 오심으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
의 참된 소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신다. 그 소명은 돕는
자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리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므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외롭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로 오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
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
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 4:18-21 ).
누가 이 말씀의 깊이와 이 말씀이 오늘날의 혼란한
세상에 가져오는 희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외롭
고 가장 절망하고 가장 환멸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하나
님이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누구보다 확
신해도 좋다. 인간적인 우정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하나
님을 계속 붙들고 있는 한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닐 것
이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남녀
홀로 느껴야 하는 외로움을 치료하시고 한 쪽으로 치우
치는 성향을 서로 보완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도 동일한 계
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만 결혼 그 자체가 온전함
(wholeness)을 가져올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
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며 희망이며 생명이신 그분을 사
랑할 때, 남녀는 서로를 온전히 알고 사랑할 수 있다. 그
러나 만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내적으로 고립
시킨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이다. 그분만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과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있다.(골 1 :17-20).
하나님은 참된 사랑의 원천이며 대상이다.
결혼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목표는 아니다. 하나님
의 형상은 먼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우리
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곳에서 가장 뚜렷하고 완전
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결혼 안에
서 남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아내와 자녀
를 인도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지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해 자녀들에
게 부모공경과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돕는 배필이 되는 것은
단지 의무가 아니라 선물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재발견했더라면 우리의 관계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는 두려움과 불신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도
대체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있는가? 공동체와 교
회를 세우는 그런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랑은 다른 사람
들과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이기심 없는 사랑이다. 두
번째 사랑은 자기만 알고 소유하려는 사랑이다. 어거스
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란 영혼의 자아이며 영혼
의 손입니다. 어느 하나를 꼭 쥐고 있으면 다른 것은 잡
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주는 무엇을 잡으려면 지
금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주4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주고 희생하는
사랑이다. 그것이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
께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새롭게 붙잡아 주시도록 기
도하자. 그러면 그 사랑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인
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들과 나누게 할 것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
라로 인도할 것이다. 사랑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비
밀이다.
제3장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 :24
결혼은 신성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결혼을 하나
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
용한다. "내가 네가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
(justice)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
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독특한 결속
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
의 사랑을 계시하신다.
결혼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 이상이다.
신약성서에서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과 일
치(unity)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요한복음에서 예
수님은 신랑에 비유되며, 요한 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 19:7-9)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
킨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수님이 결혼을 기쁜
일로 여기신 것은 분명하다. 그와 동일하게 예수님에게
있어 결혼은 분명히 성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결혼
을 파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
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반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 1 9:6-9).
이런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로부터 우리는 하나님
의 눈에 간음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간음이라고 불렀던 선지
서(렘 1 3:25-27)로부터 음녀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에 관해 기록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가 간음
에 반대하고 있다. 결혼의 결속이 깨어질 때, 간음한 자
와 배우자 사이의 사랑 - 두 사람 사이의 영과 혼의 일
치 - 도 깨지며, 동시에 간음을 저지른 자와 하나님 간
의 사랑도 깨진다.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결혼제도는 벼랑 끝에서 위태
롭게 비틀거리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결혼한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이기적
인 목적으로 함께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부부들은
희생이나 서로간의 정절 없이도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또한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길 두려워한다.
수백만의 결혼관계가 파괴되고 허우적대고 있는 지
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이 세상을 향
해 정절과 헌신을 외치고 있다. 우리 각 사람 내면 깊은
곳에는 정절(faithfulness)로 돌아가라는 억누를 수 없
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 모두 안에는 다른 사람, 또 다른
'너(thou)'와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일치되길 바라는
갈망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치가 가능하다는 믿음
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틀림없이 그 소망을 이
루어 주실 것이다.
참 만족과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때 찾아
온다. 하지만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되기를 갈망한다. 내가 만일 어떤 사람을 정
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가질
것이고, 나 혼자만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나오고 싶어
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우선은 하나님을 향해 그 다
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전히 각성하고 눈을 뜰 수
있도록 사랑과 겸손 안에서 도울 것이다. 참된 사랑은
결코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정절과 순
결의 자유로 이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충실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충
실하심을 반영한다. 모든 참된 결속을 가져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충실하심 안에
서 우리는 다른 이를 사랑하고 각자의 은사로 서로 도울
힘을 발견한다. 교회의 사랑과 일치 안에서 모든 형제
와 자매는 한 영(spirit)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마음
(heart)과 한 뜻(soul)이 될 수 있다(행 4:32).
성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약혼 혹은 결혼한 부부의 사랑과 그렇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결혼만큼 사람이 서
로 상대방에게 깊이 의존하는 관계는 없을 것이다. 결혼
한 두 사람이 서로 곁에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은 아주 특
별하다. 그리고 떨어져 있을 때조차 둘 사이에는 독특
한 결속이 존재한다. 부부간에 누리는 친밀한 관계 속에
서 두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얼굴에까
지 드러난다. 폰 가건(Von Gagern, 독일 가톨릭 정신
치료사)은 이렇게 말한다. "종종 남편은 오직 아내를 통
해 참된 남자가 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통해 참
된 여성다움을 얻습니다."5
참된 결혼관계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배우자의 행복
과 성숙을 위해 애쓰는 관계이다. 서로를 보완함으로 둘
사이의 연합은 증진된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정절과 풍
성한 결실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신비롭고 놀라운 방법
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결혼의 독특한 결속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된다는
것의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분명히 한 몸이 된
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주고 완전한 하나가 되어 마
음과 몸과 영혼이 함께 묶이고 녹아진 두 사람을 상징
한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이다. 그들의 연합은 동반자 의식이
나 동료 의식을 능가하는 열매이며 가장 깊은 친밀함이
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적고 있
듯이,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두 사람의 결단으로 이루
어지는 이 연합은 그것을 이루어낸 두 사람 이상의 무엇
이 된다. 이 연합은 서로에 대한 경외감이며, 그런 결심
의 완성에 대한 경외감이다."6
오직 이런 경외감과 하나됨 안에서만 결혼은 성적인
양심의 요구들을 채울 수 있다.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려는 의지를 통해서, 그리고 피조물과 그의 백성
간의 연합을 반영하는 부부간의 일체감을 통해서, 결혼
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시적인 형태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결혼의 중심에 계실 때, 마음과 영혼
과 몸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결혼 질서 안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경
험의 수준이 있다. 첫 번째 수준은 가장 놀라운 수준으
로 영혼의 연합, 하나님 안에서 마음과 뜻의 하나됨이
다. 이런 하나됨 가운데에서는 배우자 뿐 아니라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은 감정 수준의 연합으로, 이 때 두 사람의 사랑의
교감은 상대방의 심장박동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
하다. 마지막 세 번째 수준은 육체적인 결합인데, 그것
은 두 몸이 완전한 연합 속에서 융합할 때 나타나는 하
나됨의 표현이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부부들이 두 번째나 세 번째 수
준에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육체와 감정에 근거
한 결혼은 실망과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감
정적인 매력이나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얼마 전 우리 공동체 안
에서 자란 한 여성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자매
와 남편은 공동체의 정회원이었는데 정회원이 된 목적
이 단지 결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브
루더호프 공동체에서는 정회원 서약을 한 후에야 결혼
을 할 수 있다). "남편과 저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
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혼 전이나 후에라도 서로
의 기대에 대해 결코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는 생각이 많이 달랐답니다." 결국 남편은 아내와 다섯
자녀를 버리고 떠났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두 사람
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헌신이 그리스도 안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은 결혼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견고하고 영구적인 토대
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결혼이 참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세워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영과 마음과
뜻의 일치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
장하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는지 알지 못하
고 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질
서를 따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
이다. 참된 약혼과 결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경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잠자고 먹고 마시는 감각의 세계 속에 살면서 그보
다 훨씬 더 중요한 우리의 내적인 삶으로 돌아갈 시간을
결코 마련하지 못한다. 결혼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섹스만이 주요 관심거리가 되어 버렸고 서
로 한 마음이 되는 문제는 포기한지 오래고 더 이상 거
론하지도 않는다. 일평생 서로에게 충실을 지키는 부부
가 몇 안 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바닷가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밀물과 썰물로 인해
수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의 힘에 대
해 배우게 된다. 결혼생활과 우정관계 안에서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 관계가 바닥을 칠 때, 우리
는 너무도 쉽게 인내심을 잃거나 배우자와 거리를 두
거나 심지어 사랑을 소생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린
다. 그러나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그에
게로 돌아가 가장 낮은 바닥에서조차 믿음과 힘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중심에 계셔야 한다는 것과 그의 계명이 우리를 빚어 가
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계명이 해괴한 법이나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참
된 본성을 그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대로 지켜주는 것
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
상을 배반하고 파괴하면 할수록, 그의 통치는 낯선 것으
로, 우리를 짓밟는 도덕적인 강요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
이다.
사랑 안에서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서로의 삶을 풍성
하게 하는 것, 아이를 낳아 함께 결실을 맺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결혼생활을 복되고 거룩하고 기쁘게 만드
는 것들이다. 사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
령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의 축복을 주셨다. 바로, 아
담에게 동반자라는 선물을 주신 일이다. 이 선물을 주시
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형상이 너희 안에 살
아 있느니라." 결혼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깊은 경외심
을 가지고 이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 그
리고 모든 부부사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잠재하며 원
래 모습대로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다.7
제4장
첫 번째 범죄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
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
으로 너희 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
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
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
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1, 4-5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만드신 모든 것에 흡
족하셨다. 이 땅은 진정 하나님의 왕국이었고,
평강의 성령께서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셨다. 남자와 여
자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일치와 조화 안에서 함께 거했
으며 서로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안에
서 즐거워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경외심과 경
이로움과 생명으로 충만한 선악과나무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때 뱀이 아담과 하와를 잘못된 길로 안내했다.
그러자 악이 이내 하나님의 창조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
을 완전히 파괴시키려고 했다.
뱀은 간단한 질문 하나로 하와를 유혹했다. "하나님
이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니?" 그리고 간단한 약속 하
나에 하와는 넘어간다. "넌 결코 죽지 않아!" 이 말의 의
미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유혹자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와를 유혹했다. 이것은 사단이 후에 예수님
을 시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만은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가르고,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다.
하와가 고개를 쳐들어 나무 열매를 보고는 탐을 내
어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이 들었던 게 교만 때문이 아
니라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말 말씀하신 대로 하실지
안 하실지 시험한 게 아니었던가? 뱀은 하와의 마음속
에 의심을 불어넣었고, 하와는 커다란 호기심을 갖고 뱀
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이런 행동 자체가 하나님
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오늘
날 어떤 모습으로 일하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형제자매에게
서, 이웃에게서 갈라놓지 못해 여전히 안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 주의하지 않는다면 사단은 겉으로는 전
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져 우리 마음에 불신과
분열의 씨를 뿌릴 수 있다. 사단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한다(고후 11 :14). 그러나 사실 사단은 태초부터
중상 모략하는 자, 진리를 왜곡하는 자, 거짓의 아비, 살
인자였다. 사단은 우리를 무질서와 혼란과 의심의 바다
속에 던져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리고 거기에 당
한 사람도 적지 않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40일
을 금식하신 후라 육체적으로 몹시 약해져 있었다. 이것
을 모를 리 없는 사단은 동정어린 표정으로 예수님께 접
근해서 세상 모든 나라를 그에게 주겠다고 제안하며 거
짓으로 경외했다.
그렇지만 이미 첫 번째 유혹에서 예수님은 사단이
유혹하는 자, 진리를 왜곡하는 자란 사실을 꿰뚫어 보셨
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고 단 한 순간도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
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고 의지하셨고, 사단은 그분의 마
음에 파고들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은 단순히 금단의 열매가
아니었다. 그것은 교만이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기적
인 욕망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신뢰와 순종과 의뢰가 없
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우
상으로 삼아 숭배하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운명에 내려진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
처럼 되려는 시도이다. 본훼퍼(Bonhoeffer)는 말한다.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처럼 되라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스스로 신이 되고 말았다(a god against God)."8 그 결
과 인간의 영(spirit) 안에 깊은 질병이 생겼다. 이제 하
나님의 형상은 도둑맞았고, 우상 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뒤틀려졌다. 그리고 커다란 어두움과 고통을
가져왔다(롬 1 :23-32).
거짓 사랑은 모든 것을 주는 기쁨을 가로막는다.
아담과 하와는 사랑에 대항하여 죄를 지었다. 둘 다
거짓 사랑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오늘날 사랑의 이름으
로 얼마나 많은 파괴와 영혼 살인이 자행되고 있는가!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빛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을 평가하
는 가치기준이자 사랑이 추구하는 최종목표는 하
나님입니다. 하지만 거짓된 사랑은 지고선이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므로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9
이 말은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진지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배우자도 자녀도 아닌, 하
나님 한 분만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만 한다.
아내와 나는 결혼생활에서 하나님이 우리 관계에 최우
선 순위에 계시지 않을 때 그리고 사소한 일에서조차 우
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을 때,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 상실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유 없이 말대꾸하거나
자기들끼리 싸움이 잦아졌다. 나는 많은 가정 안에서 동
일한 현상을 목격했다. 부부가 각기 흩어져 표류할 때,
자녀들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불안을 표출한다. 우리
의 경우, 다른 많은 부부들의 경우처럼 일단 아내와 내
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
자 아이들도 금방 반응을 보이고 좋아졌다.
배우자나 자녀를 우상화할 때 우리의 사랑은 거짓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결점이나 가족들의 결점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없게 된다. 아담처럼 우리는 더 이
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그분의 안색을 살피
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배우자나 자녀들의 안색을 살
핀다. 부닥치는 문제를 직시하기 보다는 대충 얼버무리
고 만다. 이런 식으로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그리고 서로 간의 접촉을 상실한다. 더 나쁜 것은 이것
이 악-특별히 성적인 영역에서-과 내적인 죽음과 고립
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순수함
을 잃어버렸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뒤따라 온 그 끔찍한 공허감으로 인하여 남자는 여자를
원망하고 지배하려 들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분
개하며 사단을 원망했다. 모든 연합은 파괴되었고 남자
와 여자는 경쟁자가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가 아
니었다(창 3:7-19).
우리의 결혼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될 때 곧 경쟁이
뿌리를 내리고 이기심이 우리를 지배한다. 서로 주도권
을 잡으려는 보이지 않는 암투 가운데 두 사람은 각자
편한 대로 자기만의 작은 천국을 만들려고 아옹거리지
만 찾아오는 것은 공허감과 허탈감뿐이다. 내적인 하나
됨이 파괴된 상태에서 용케 서로를 연결해 주는 것은 기
껏해야 남녀간의 충동적인 끌림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
는 계속해서 서로를 원망하며 자신의 유익과 독립을 추
구한다. 모든 것을 주는 기쁨은 사라지고 단지 냉담한
마음의 저주만이 남는다.
독립하려는 탐욕스러운 의지는 하나님 안에 있는 생
명에 대한 적이다. 나의 할아버지 에버하르트 아놀드
(Eberhard Arnold, 1 833-1935, 저술가, 신학자, 아
내 에미와 브루더호프를 설립함)는 이런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의지는 "맘몬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의 망령이며, 소유를 기초로 한 관계를 다스리는 법률의
정신이며, 동시에 영혼의 하나됨과 일치 없이도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분리의 영이다. 이것들은 모두 죽음으
로 이끌며 하나도 생명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10
무엇이든지 생명과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은 악
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악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죄는 항상 분리로 이끌며 죄의 삯은 언제나 사망
이다(롬 6 :23). 죄악 된 교만은 우리를 하나님, 우리의
참된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땅으로부터 소외시키
고 분리시켜 쓴 열매를 맺게 한다. 사단과 죄는 우리가
소유한 가장 근본적인 관계들을 산산이 부순다.
고대 이래로 줄곧,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을 뿔 달린
괴물로 그려왔다. 그러나 그런 개념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사단과 그의 악마들은 대기권처럼 악의 힘으
로 이 땅을 둘러싼다(엡 2 :1-2, 6 :12 ). 그 놈의 유일한
목표는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인간들을 눈멀게 하는
것이다. "넌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우리는 단순한 복
종의 길을 가는 대신 유혹에 발을 내딛는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 나눠지고 소외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첫 번째 범죄는 우리들 각자
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
님의 원래 형상이 몹시 비틀어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
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으
로 만족하는 대신,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애쓴다. 우리
는 우리 안의 가장 고귀한 속성을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
는 데 사용한다. 세상적인 '자유'에 빠져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나 그분의 원래 형상에 관심이 없다. 이젠 완전
히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 일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남으로 느껴지는 소외감과 자
기 분리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서 단절된 우리는 자신을 우
주의 중심에 두고 소유와 쾌락 속에서 평화를 찾으려
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우상들은 우리를 불안과 번민
으로 괴롭힐 따름이다. 그때 불신에 찬 첫 번째 질문은,
'왜?'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정말 있는
걸까?'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 거야? 왜 내가?' 라고
묻는다.
이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
이 아니라 사람간의 신뢰까지 무너져 버리면서 죄로 연
결되기 쉽다. 완전한 신뢰란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을 잡
고 그가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이 어두움과
고통을 통과할지라도, 바위와 사막 같은 어려운 장소를
통과할지라도, 신뢰는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도록 도
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든다면 아무것도 우
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놓고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하
지 않느냐의 문제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셔야 했다.
예수님도 배고픔, 목마름, 외로움, 번민에서 제외될 수
없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비참한 신세로부터
달아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이겨낼 힘
을 주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계신다(히 2 :14-18). 아
무리 강한 사단의 유혹일지라도, 아무리 지독한 어려움
의 순간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이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
니라"(마 4:10). 이것은 신비이며 비밀이다. 여기서 사
단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힘을 상실하고 아담이 지은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더 이상 우리를 결박하지 못하
게 된다.
제5장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기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
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
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
음이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
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3:17-18, 5:17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인간의 그 어떤 관계보다
강하다. 다른 모든 관계는 단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
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늘 새롭게 경외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결혼이나
그 외 모든 관계에서 패배를 경험하고 어떤 해답을 찾지
못해 좌절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죄악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그 형상의 희미한 잔
영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
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운명까지 잃어버리길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째 아담인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롬 5:17-19).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의 형상은 모든 남자와 여자 안에서 회복될 수 있고, 모
든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서로에게 가는 길을
여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화평케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시고, 우리 각자
삶 속의 내적인 불일치를 없애시려고 오셨다(엡 2 :11 -
19). 기운을 잃고 의기소침할 때 더더욱 우리는 예수님
을 찾아야 한다. 찾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을 발견할 것
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
리라"(렘 2 9:13). 그리고 복음서에는 이런 놀라운 말씀
이 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 :10)
이 말씀은 오늘도 참되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선
물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이 인간으
로서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그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일
은 오순절의 경험 - 개인적인 회개, 회심, 믿음 - 이 우
리에게 실제로 강력하게 일어날 때만 가능하다.
성령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이 땅에 강림한 오순절
의 기적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어느 때든지 일어날 수
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부
르짖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그리고 이에 대해 "회개하
여 각각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
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 :37-
40)고 외치는 베드로의 응답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
있는 곳마다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포기를 통해 온다.
우리는 십자가에서만 용서와 구원을 발견할 수 있
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다. 이 죽음을 통
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사람과의 사귐을 막는 모
든 장애물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리고 이 사귐들이 새롭
게 회복된다. 우리를 속박해온 죄악을 포기함으로 우리
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하거나 나아질 수 없다. 우리
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완전히 포
기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렇
게 되면 우리 삶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 분의것이 된다.
나의 아버지 J. 하인리히 아놀드는(Heinrich Arnold)
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만일 사단의 궤계와 공격 때문에 받은 상처를
치유 받기 원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품었던
절대적인 신뢰를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님께 가져
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것은 죄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를 신뢰 안에서 그분
앞에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용
서와 정결함과 마음의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
리고 이것들은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11
'우리의 죄를 신뢰 안에서 그분 앞에 내어놓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자유와 화해는 우리가 양심의 찔림
을 고백할 때마다 시작된다.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죄는
그곳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나
의 친구 달렌(Darlene)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우리 양
심을 내리 누르는 죄들을 빛으로 가져 갈 때, 즉 무조건
죄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정결해지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
9학년 무렵, 제 맘을 빼앗은 남자가 있었습니
다. 밤마다 그를 상상하며 수많은 편지를 남몰래일기장에 적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수없이 그 남자 집을 기웃거렸습니
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제 환상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
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저는 다른 애들 틈에 끼
지 못하고 따돌림 당할 까봐 말하고 행동하고 입
는 것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생활했어요. 그리
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러 남자 애들과 불장
난을 쳤습니다. 내가 받은 가정교육 탓에 죄책감
을 느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시해 버렸
습니다. 나는 양심의 주장을 억눌렀고 어떤 상황
이든 다룰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키부츠에서 1 년을 보낼
작정으로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그곳에 도착하
고 처음에는 연일 계속 열리는 파티와 십대들 간
의 문란한 성 관계 때문에 무척 놀라고 힘들었어
요. 그러나 곧 저도 그곳 사내들의 방을 들락거리
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술 파티와 디스코텍
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러나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진심으로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한 남자와 깊은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남자가
소문난 바람둥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믿고 싶었고, 그럴수록 더 그 남자에게 매달리
게 됐습니다. 저는 점점 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강하기 때문에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고 큰
소리쳤던 바로 그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
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저는 그가 다른 여
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는 줄 알았습
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2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저는
이제 제 문제를 극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남자가 핑크 빛 미래를 약속하며 제게 다
가왔습니다. 그 남자는 제가 너무 아름답다고 칭
찬하며 저를 정말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말했습
니다. 저는 절망적으로 그 남자를 믿고 싶었습니
다. 그러면서 손을 잡던 것이 포옹으로, 키스로,
신체 접촉으로 발전하게 됐죠. 그 남자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왔고, 저는 밀려오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애써 외면했어요. 그가 성 관계를 요구
했을 때 저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자꾸만 죄악
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도 어
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집에서 도망쳐 나
와 그 남자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나를 죽이겠
다고 위협까지 했지만 저는 그래도 그를 사랑한다며 시키는 대로 다하겠다고 매달렸습니다. 그
리고 다음 날 그 남자는 사라져 버렸고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 저는 자살도 여러 번 생각했습
니다. 머리와 복부에서 계속 통증을 느꼈습니다.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섹스에 광적으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를 '사
랑'해주는 남자 없이는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했습니다.
그런 사내들 중에는 심지어 다른 여자와 약혼 중
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점점 더 자포자기 상
태에 빠졌고 남몰래 몇 시간이고 울기도 많이 했
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창녀가 된 느낌이
었지만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는 행복하고 자신만
만하다는 인상을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중적인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
했습니다. 마침내 거짓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이 제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시
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죄로부터
벗어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악마는 저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꿈
속에서까지 저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고백을
한 후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과 기도
로 도와준 식구들과 교회도 정말 큰 힘이 되었습
니다. 저는 특별히 처음 몇 주 간 저를 괴롭히던
악한 영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기도의 힘이
었다고 믿습니다.
몇 달간의 힘든 싸움 끝에, 마침내 저는 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제 모든 죄가 용서받았
다고 선포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결코 잊
을 수 없을 겁니다. 그 순간 경험한 능력과 기쁨
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죄에 억눌릴 때 누군가 털어놓을 사람이 있
다는 것은 큰 선물이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
게 쏟는 것은 댐의 수문을 여는 일과 같다. 물이 쏟아질
때 압력은 사라진다. 만일 정직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
백이었다면 아주 깊은 안도감이 찾아 올 것이다. 그것은
용서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
으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우리는, 아
담과 하와가 불순종했을 때 시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에
게서 도망치거나 숨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의 아들 예수님의 빛 안에서 기꺼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태워버리실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첫 남자와 여자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그의 평화로운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일하라는 임무를 주신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
를 우리 삶 속에 즐거이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베들레
헴 말구유에서 시작되어 골고다 십자가에서 끝난 예수
님의 길을 기꺼이 온전히 걸어가야 한다. 그것은 매우
느리고 겸손한 걸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빛과 희
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제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자유하
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어 깨우시
며, 순결하지 않음과 미움과 불화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
다(히 9:14). 만일 우리 양심이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아무리 나쁜 죄를
짓고 심하게 타락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의 적이었던 양심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친구
가 된다.
용서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능력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죄의 용서는 너무도 강력해서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우리를 위협하고 고립
시키는 모든 것들, 우리를 더럽히고 기만하는 모든 것들
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린다면 길을 내어 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것이 패할 것이며 패했던 것이 승승장구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모든 관계를 포함해서 우
리의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을 모두 바꿔 놓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변화되었는지 여부는 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죽어
가는 사람 곁에 있어 본 사람은 하나님과 각 사람의 내
적인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중요한지 알 것이다. 생
을 마감하며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이 관계보다 중요
한 것은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모든 사람의 평생 과
업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소자에
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과업
을 수행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또 말씀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는 지금까지 임종을 맞는 사람을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늘 남을 위해 생을 보
낸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과 매우 가깝고 친밀한
데 비해 죄 가운에서 이기적인 삶을 산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 모두는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 예수님의 영
원한 치유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사랑과 빛이 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 관계들은 우리를 짓누르고 사
랑을 반대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순결해질 수 있다. 그리
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될 수 있다.제6장
성행위와 감각의 영역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
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
하여 짐이니라.
디모데전서 4:4-5
성경은 한 사람의 내적인 삶의 중심이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 마음속에서 결정도 내리고 어떤 영을
따를 것인지도 정해진다(렘 1 7:10). 그러나 또한 하나
님은 우리를 감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성적인 매력
을 포함해서 감각으로 감지되는 모든 것들은 감각의 영
역에 속한다. 꽃 향기, 따사로운 햇살, 아가의 첫 미소는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하나님은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감각을 사용
해서 그분을 찬양하고 경외한다면 엄청난 행복을 줄 것
이다.
감각적 경험의 영역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
리고 갈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우리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단의 어둠 속으로 데려 갈 수도 있다. 우
리는 너무나 피상적인 것들로 흐른 나머지 하나님이 우
리에게 주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우리가 경험한 것을 우리 감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을 잊고 그분 뜻의 충분한 깊이
를 경험할 가능성을 놓쳐버리고 만다.
영구적인 기쁨은 우리의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
감각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
분의 솜씨를 거부하는 것이다(딤후 4:1-3). 성령께서
도 우리가 몸이나 몸의 감정적인 능력들을 거부하길 원
치 않으신다. 그러나 이런 선한 것들을 사단이 훼손하려
고 애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단은 진리를
왜곡하는 자이며 특별히 감각의 영역에서 우리를 속이
려고 벼르고 있다.
아는 바와 같이, 인간 영혼(the soul)은 영(the
spirit)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렇지만 우리 영혼
은 육체라는 물질적인 것에 묶여 있다. 물질적이고 육체
적인 것이 영의 진짜 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결코 경멸
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영의 진짜 적은 사단이다. 사
단은 인간의 영혼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하나님과 이간
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생명의 모든
요소 - 영(spirit), 혼(soul), 육(body) - 가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고전 1 0:31).
감각의 영역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일정 수준에서 볼 때 감각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하나님
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동물과는 달라야 하기 때
문에 훨씬 높은 수준의 것들이 요구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맨 처음 감각의 수준에서 기
쁨을 느낀다. 서로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더 이상 부러
울 게 없고,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릴 것이
다. 거기다 손을 잡거나 서로의 체온을 느낄 만큼 가까
이 있을 때는 그보다 행복한 것이 없다. 물론 이런 경험
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의 영역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만
우선은 감각적인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이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 더 깊은 수준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감각적인 것
들 자체가 목적이 되면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해지면서
점점 더 강하고 자극적인 경험에서 만족을 구하게 된다
(엡 4:17-19). 그리고 이렇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채우
는 데 모든 정력을 소비하게 되면 곧 우리 생명에 없어
서는 안 되는 활력까지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더 깊은 내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 능력조차 잃
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체 식구 중에 결혼한 지 30년이
된 한 형제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희 부부가 신혼이었을 때, 저는 아내가 항
상 맵시 있고 섹시하게 옷을 입길 원했습니다. 당
시는 미니스커트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습니다.그래서 저는 아내가 그 옷을 입으면 잘 어울리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가 아내나 다
른 남자들이나 그리고 제 자신에게 어떤 폐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예
수님께서 분명히 지적하신 음탕한 시선을 조장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아내와 저는
이런 우리들의 태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신체적인 외모를 불건전하게 강조하는 태도로
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보다 참된 관계로 나아가
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우리 자신을(감각까지
포함해서) 그분께 복종시키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하나
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 나는 감
각적인 만족을 채우는데 몰두했던 사람들이 목표 없는
피상적인 삶을 살다 어떻게 생을 끝마치는지 수없이 보
아 왔다. 감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좌절과 혼란
에 빠진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라면 감각적인 것들 안
에서조차도 영원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서만 우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참되고 영원한 것을
향한 갈망들을 채울 수 있다.
성적인 영역을 하나님께 복종시킬 때
그것은 선물이 된다.하나님의 선물인 감각은 신비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
면 신비를 잃고 거룩함도 더럽혀진다. 이것은 특별히 섹스
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생활은 그 자체가 깊은 친밀
함이기 때문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숨기고 싶어 한다. 섹스
는 모든 사람의 비밀이며,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존재에 영
향을 주고 또 그것을 표현한다. 이 영역에서 노출은 친밀하
고 개인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의 비밀 속으로 상
대를 들어오게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적 영역은 하
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면서 동시에 수치를 느끼는 영역이
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비밀이 벗겨지면 우
리는 수치스러워 한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
한 것은 자신들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는 본성
을 통해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자각
은, 많은 심리학자들의 주장처럼, 건강하지 못한 정신 질환
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을 보호하기 위
한 본능적인 반응이며 모든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성적인 결합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사랑의 결속의 완성
이자 그 표현이다. 그리고 성적결합은 다른 인간에게 자신
을 포기하는 최고의 표현이다. 각 사람의 가장 은밀한 비밀
을 서로에게 누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결속이 맺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입된 성적인 행위는 그
것이 어떤 형태이든 신성모독이다. 설사 결혼을 염두에 둔상대라 할지라도 요즘 폭 넓게 '실험'되고 있는 혼전 성 경
험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행위는
미래의 결혼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남녀 사이의 친
밀함이란 베일은 반드시 결혼 안에서 하나님과 교회의 축
복을 받으며 거두어져야 한다(히 1 3:4).
그리고 결혼 안에서조차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모든 성
적인 친밀함의 영역은 반드시 그리스도 아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
도를 중심에 모신 결혼과 육체(flesh)에 초점을 맞춘 결혼
을 아주 잘 대비시켜 설명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
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
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19-24
정욕을 탐식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적
영역에 포함된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탐식도 물론 바울이 정죄한 것 중에 하나이지만 우리가정욕이나 성적인 음란의 유혹에 넘어갈 때 더럽혀지는 것
은 탐식으로 더럽혀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식이다. 음욕과
성적인 타락으로 입은 상처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
지 파고들며 우리 영혼의 핵심부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성
적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악마의 포로가 되어 존재
전체가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뉘우침
과 회심 외에는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불결함(impurity)의 반대는 율법주의가 아니다.
성적인 불결과 육욕의 반대는 체면이나 도덕주의나
거짓 경건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 (마 2 3:25-28) 감각으로 경
험하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참되고 자유로운 기쁨을
누려야만 한다. 파스칼은 말한다. "열정은 그것을 부인
하려는 사람들 안에 가장 강하게 살아있다." 욕망을 도
덕적인 강요로 억누르고자 할 때, 욕망은 거짓되고 변태
적인 새로운 통로를 찾게 되어 있다(골 2 :21 -23).
수치를 모르는 이 타락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과 하
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깊이 경외하며 자녀를 키
우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자녀들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순결의 삶에 헌신하
는 남성과 여성으로 자라도록 최선을 다해 그들을 양육
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녀들이 성적인 문제에 관해 함부로 말하지않도록 경계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주제를 회
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존중하는 마
음을 갖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질
서 안에서 성의 중요함과 신성함을 이해하도록 아이들
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결혼이란 유일한 목적을 위해
그들의 몸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
요한 일인지 깊게 심어줘야 한다. 또한 성은 오직 순결
하고 거룩한 결혼 안에서만 최고의 완성에 이를 수 있
고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자녀들은 배워
야 한다.
하나님은 젊은 부부가 충만한 연합을 경험할 때 기
뻐하신다. 먼저 마음과 뜻이 하나 되고, 그런 다음 영혼
과 영혼이 하나 되고, 그런 뒤 몸이 하나 될 때 둘은 완
전히 연합하게 된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 뒤 하
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경외심을 가지고 성의 베일을 걷
어 올릴 때, 이런 두 사람의 연합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모든 부부들이 이런 경외심의 태도를 갖기 위해
애써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제7장
마음이 순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pure)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
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
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린도후서 7:1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말하
길, 순결한 마음은 한가지만을 바란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다. 우리 마음은 하나
님을 떠나서는 희망을 잃고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순결
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
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이다. 성생활에서 보자면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방식으로 성을 오용하는 것을 말한다.
불순함은 결코 우리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러
기에 겉만 말끔히 씻어버린다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
다. 불순함은 우리의 상상에서 시작되며, 몸 안에서부터
곪아 터져 나오는 상처와도 같다 (마 1 5:16 -20). 불결
하고 음란한 영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고 늘 자신을위해 뭔가를 훔치려고 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도 더
많은 것을 탐낸다. 불결함은 영혼을 더럽히고 양심을 타
락시킬 뿐만 아니라, 삶의 통일성을 파괴하며 결국에는
영적인 죽음으로 몰고 간다
불순하고 음란한 마음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고 자유롭지도 않다.
불순하고 음란한 것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도록 허
용할 때마다 우리는 사단의 세력에 문을 열어주는 것인
데, 이 세력은 성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된다. 특정 스포츠에 열광적으로 빠지
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로 음란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 명예나 권력을 얻기 위한 야심찬 집착도 마찬
가지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에 마음을 뺏길 때 우
리는 불결하고 음란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생활에서 음란이란 오로지 욕망을 채우는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결혼이라는 영
구적인 결속을 맺으려는 의도 없이 성적인 친밀함으로
들어가는 것도 음란이다.
음란의 가장 뚜렷한 형태 중의 하나는 돈을 위해 성
관계(또는 그 외 성적인 행위)를 할 때 나타난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창기와 하
나가 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인간의 몸을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자기만족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 속에서 그는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기 자신
에게 죄를 범한다. "매춘부에게 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
의 살해자이다"(고전 6 :15-20). 부부간일지라도 그저
성욕을 채우기 위한 성 관계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다. 폰 힐데브란트(von Hildebrand)가 말하듯이, 그런
관계는 영혼을 마비시키고 죽이는 달콤한 독을 품고 있
다.
그렇다고 음란함의 반대가 성적인 감각의 부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성적인 자각이 없다는 것이 반
드시 순결을 위한 좋은 토양은 아니다. 성적으로 둔감한
사람은 사실상 불완전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인간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타고난 성향에서 뭔가가 부족한 사람
이며,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다채롭게 하는 무언가가 없
는 사람이다.
순결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
들은 두려움이나 혐오를 감추려는 위선적인 태도로부
터 자유롭다. 그러나 성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을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결혼을 통해 그 지
경에 들어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
지한다.
결혼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성적인 느낌을 억누
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답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때 그들은 순결해질 수 있다.
결혼 안에서 두 사람은 성적인 영역의 신성한 부분을 서로에게 맡긴다. 그런데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선물
을 서로에게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가 설사 생각으로라도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성(sexuality)
을 결혼의 거룩함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내적으로 조화롭고 더
없이 깨끗하길 바라신다. 그런 마음속에 순결이 거한다
(약 4:8).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만일 한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나눠
져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마음이 '한결
같지' 않다면,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
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강력한 행동을 취하기
에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하고 무능력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한결같은 마음, 단
순함, 일치, 연합, 단호함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
셨습니다. 마음의 순결이란 다름 아닌 온전히 통
일된 마음(integrity)입니다. 그것만이 마음을 갈
라 무력하게 만드는 욕망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
니다. 포용적이고, 진실되고, 강직하고, 자신감 있
고, 용감하고, 흔들리지 않고, 강인한 마음이 되
기 위해서는 심지가 굳고 한결같은 마음이 필요
합니다.12순결함으로 가는 열쇠는 겸손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순결(청결)한 사람과 온유
한 사람을 축복하시며 그들이 땅을 상속하고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순결함과 온유함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둘 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결과 온유는 타고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을 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애써 추구해 볼 만한 것 중에 이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성적인 음란에 대항한 싸움은 비단 젊은이들만의 문
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이가 더 들고 성숙해
져도 문제는 여전하며 평생 힘겨운 싸움거리로 남는다.
순결에 대한 갈망은 분명히 선하고 필요하다. 그렇지만
다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단'만으로는 안 된
다. 순결은 오직 용서를 경험할 때 선물로 주워질 수 있
다. 그리고 그런 후에도 유혹에 맞선 우리의 전투는 계
속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얼마나 자주 혹은 얼마나 심하게 유혹을 당한다
해도, 만일 그분께 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
님께 간구해 주실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든 유혹
을 이길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겸손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
심을 경험할 수 있다. 교만한 자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음란, 거짓말, 도둑질,영적인 살인과 같은 온갖 종류의 악에 열어 놓는다. 이
중에 한 가지 죄를 범하면 나머지는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순결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항상 넘어질 것이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해 하지만 곧 죄
와 어둠 속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
스로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성적인 영역에서 유혹을 받는다. 이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갈등을 신
뢰할 만한 사람에게 기꺼이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게 된다.
프랭크라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면서
생긴 갈등에 대해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저는 제 자신이
특별하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
단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되자, 저는 부모님이나 다
른 사람들에게 고민이나 어려움을 털어놓는 것
이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성장하면서 저는 '모
범생'이 되려고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멋
지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았고 그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기 망상은 대
학 시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군중을 쫓아
다니며 대학 생활이 이끄는 대로 떠다녔습니다.나이를 먹어가며 저는 또래 친구들이 성숙한
성인이 되어 어떤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제
자신이 낙오자가 되어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의 깊은 불안을 숨기기 위해 세련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정신질환으로까
지 문제가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으로 건
강한 사람의 모델을 찾기보다 오히려 영적인 은
사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 흉내 내려고 했
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서, 제 삶에는 어떤 만성적인
문제가 있다는 두려움이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제 교만 때문에 저는 불신과 의심과 증오심으로
스스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아무도 모르게 성적으로 음란한 생활에 빠
져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알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늘 시달리면서도 이런 모든
죄를 숨기려고만 했지요.
지금까지 나는 조금만 일찍 도움을 받았더라면 이처
럼 심하게 낙심한다거나 성적인 타락으로 빠지지 않았
을 사람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들의 문제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서 심한 경우에는 범죄, 마약, 알코올 중독
에서 탈출구를 찾기도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
은 그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순결을 위해 힘쓰도록 그
를 격려해 줄 친구나 목회자이다. 프랭크도 결국 자신의절박한 필요를 직면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것은 거의가 교만이 옷
을 바꿔 입은 모양으로,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잘못을 인
정하려고 하질 않기 때문에 더욱더 유혹에 쉽게 넘어가
게 된다.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 산다. 때
로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항상 일으켜
주실 것이며 깊은 소용돌이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주실
것이다.
물론 우리의 갈등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은
예수님 아래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우리의 능력을 분산시키는 정욕들을 이기신다. 성령에
더욱 강하게 붙잡히면 붙잡힐수록 우리는 우리의 참된
특성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누가 마음이 순결(청결)한 자인가?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순결을 위해 날마다
얼마나 진지하게 싸우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가 음탕한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우리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7-30).
음란한 행동의 유일한 유발자인 음탕한 생각에 관해 예
수님이 말씀하신 사실은 이 싸움에서 마음의 단호한 태
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훼퍼는 말한다. "마음이 순결한 자는 누구인가? 오직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완전히 내어드려서 그분만
이 자기 안에 계시도록 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
음이 자신의 악은 물론이고 자신의 덕으로도 더럽혀지
지 않은 자들만이 순결하고 청결한 자들이다."13
순결한 남자와 여자들은 성적인 영역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할 줄 안다. 그들은 그 영역 고유의 속성
을 의식하고 그것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선물
로써 충분히 인식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 선물의
아주 사소한 오용조차도 악한 영들에게 문을 열어 준다
는 것을 예리하게 의식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는 이 영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런 이유로 그들은 영혼을 더럽히게 될 상황은 어떻게 해
서라도 피하고, 다른 사람을 죄로 인도하는 것은 생각일
지라도 혐오한다.
순결을 위한 싸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탐욕, 허영, 그리고 모든 형태의 방종을 포함해 성적인
부도덕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히 거부해야 한
다는 사실이다. 음란한 것은 '일부'라도 허용하지 말아
야 하며 하나까지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다면 우리는 이런 태도를 흐려 놓은 모든 위협에
대해 본능적으로 대항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 공동체는 소속된 모든 멤버 사
이에 순결의 분위기를 위해 날마다 싸워야 할 커다란 책
임을 갖는다(엡 5:3-4). 순결을 위한 싸움은 반드시 정
의와 공동체를 위한 싸움과 병행되어야 한다. 정의에 대한 열망 없이 순결에 대한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
문이다(약 1 :26 -27). 순결은 단지 성적인 영역에만 관
련되지 않는다. 이웃이 배고픈 줄 알면서 음식을 주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 먹을 것, 마실 것, 물품, 힘, 심지어 지적 활동이
나 창작 활동도 - 함께 나누었고 하나님께 그것들을 올
려 드렸다. 그들은 한 마음과 영혼을 소유하고 모든 것
들을 공유했기 때문에 승리를 이룰 때까지 한 몸이 되어
모든 것과 싸울 수 있었다.
결혼이 순결을 보장하지 못한다.
순결에 대한 갈등이 결혼을 하자마자 종식된다고 생
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결혼은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
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결혼하는 순
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생각하
지도 못한 문제들이 비로소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는 연합이 커다란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결혼은 다른 것보다 자기중심적 자아를 약하
게 하는 점에서 사람을 회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렇지만 결혼 자체가 갖는 이런 회복의 효과는 완전하지
않다. 어떤 부부도 상대가 고민하는 양심의 짐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완전한 구원과 회복은 오직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혼인증서가 순결의 보증서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참
된 관계가 실패한다면 부부간의 성은 순식간에 참된 깊
이와 존엄을 상실하고 사실상 존재의미를 잃게 된다. 아
무리 부부간일지라도, 이렇게 성이 본래 의미를 찾지 못
하고 천박한 채 남아있게 된다면 부부관계는 파멸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결속의 신비
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혼인 신고를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보
증수표로 사용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
한 중년 부부가 '성생활에 활력'을 주기 위해 침실에서
정기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포르노 비디오를 시청했었
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그들은 이 행동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도 부부가 서로를 즐기길 원
하시지 않을까요?" 이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들은 자
신들의 애정 생활이 얼마나 왜곡되고 값싸져 버렸는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성 관계를 보면서
자기들에게 맞추려는 시도는 결국 서로에게 불만족하도
록 부채질하는 것이다.
부부관계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하심이 명백하
게 드러나야 할 곳은 없다. 그러므로 결합할 때마다 남
자와 여자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다가가며 가졌
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창조자와 결혼의 신비를 향해 항상 경이를 표해야 한다.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육체적으로 하나 되는
성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그 독특한 기능을 심오한 방
법으로 수행한다. 성은 부드럽고 평화롭고 신비한 무엇
이다. 동물의 난폭하고 탐욕적인 것과는 달리 인간의 성
은 심오하면서 서로 내어주는 독특한 결속을 만들어낸
다.
부부가 이런 방식으로 성적인 영역을 경험할 때, 그
들의 결합은 단순한 생식의 수단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잉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마음을 소유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결합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기도처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음란하고 순결하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은 예수님 없
이는 성적 영역이 가지는 깊이와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누구라도
말끔히 치유 받을 수 있다.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
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
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2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
제8장
성령 안의 결혼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
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
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결혼생활에는 시련과 위기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
만 이런 위기를 통해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 진
실로 사랑하는 부부라면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다.
겸손히 서로 복종함으로 서로 돕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
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진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어
떤 사람들은 진실한 사랑은 동화 속에나 나오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무시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찾는
데 너무나 많은 정력을 쏟은 나머지 아주 놓치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나오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랑
의 축복을 경험하는 부부는 어떤 시험과 마주치던 간에
해가 거듭될수록 사랑이 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행복하게 만
드는 일에서 여전히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결혼 40주년을 넘긴 내 사촌 하이디(Heidi)는 사랑
의 표현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작은 사랑
의 표현이 큰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 클라우스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
런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런 어려움을 통해 우리 사랑은 더욱 깊어졌습니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
으로 인해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
는 우리 부부관계가 로맨스 없이 존재할 수 있으
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준
비한 작은 선물과 깜짝 쇼는 우리의 사랑을 거듭
확인케 했고 새롭게 했습니다. 남편이 새로 지은
시를 적어주거나 돌 위에 예쁜 그림을 그려 줄 때
저는 늘 놀라움과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올 무렵 남편을 위해 차 한
잔을 준비하고 그 옆에 장미 한 송이나 갓 따 엮
은 꽃 한 묶음을 올려놓으면 그가 얼마나 좋아하
는지!
그 날 겪은 사소한 경험들을 서로 나누며 한바
탕 웃을 때, 우리는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삶의 활력을 다시 발견합니다. 결혼은 참으로 진지한 삶의 헌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나
는 우리가 이 헌신을 아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으로 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
하며 한번에 한 발자국씩 걸어갈 수 있다고 믿습
니다. 그 동안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실수하
고, 의견이 엇갈려 언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서로를 사랑합니다.
성령은 완전히 다른 경험의 세계를 열어주신
다.
남녀가 관계를 형성해 갈 때 일반적으로 서로의 감
정이나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호
감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
지만 한 가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성령께서는 남편
과 아내 사이에 완전히 다른 경험의 세계를 열어 주신다
는 사실이다.
감정적인 수준에 근거한 부부간의 사랑도 분명히 아
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고
그로 인해 불행해질 수 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불안전한 기초이다.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사랑은
확실해지고 견고해진다.
만일 우리가 인간적인 수준에서 가능한 일치와 사랑
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정처 없이 떠다니는 구름과 같다.우리가 성령 안에서 일치를 추구할 때 하나님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성실한 사랑의 불을 우리 안에 밝혀 주실
것이다. 성령은 쉬이 식고 변할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
시며,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진실한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령 안에 있는 결혼은 서로에 대한 충실함으로 나
타난다. 충실함이 없는 곳에는 참된 사랑이 없다.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결혼을 위협하는 유혹이나 시험
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시련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정
절은 더 다져지고 강화되어야 한다. 정절은 우리의 소명
을 내적으로 확신할 때 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복하고 따를 때 오는 것이다.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이라는 책에서 재
세례파 피터 리데만(Peter Riedemann)은 결혼에 대
한 하나님의 질서가 세가지 수준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
명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결혼, 그리스
도와 그의 교회의 결혼, 성령과 인간 영(spirit)의 결혼
이다(고전 6 :17). 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다. 그것은 영과 혼의 교제와 정의의 공동체이다. 세 번
째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14 한 남
자와 한 여자의 연합이다(엡 5:31).
결혼의 가장 확실한 기초는 믿음의 일치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엡 5:25) 남편들이 아내들을 사랑하라고 말
하면서 사도 바울은 결혼과 영적인 연합을 나란히 비교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은 가장 깊은 연합 즉,
하나님과 교회의 연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의 결혼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연합이다. 궁극적으
로 그것만이 결혼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근
거이다. "먼저 그의 나라(kingdom)와 그의 의를 구하
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결혼은 항상 믿는 두 사람을 예수님과 그의 나라로
더 가까이 인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교회 건물에서 혹
은 목회자의 주례로 결혼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각자 먼
저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교회 공동체에 온전히 헌신해
야 한다. 먼저 신앙과 영의 진심어린 연합이 있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 영혼과 몸의 참된 연합 또한 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우리 멤버 중 한 사람이 우리의 신앙이나 공동체로 사는
부르심을 함께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 연합하는 것에 동
의할 수 없다(고후 6 :14)(에스라 9장과 1 0장에는 이스
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선
지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깊이 회개해야 했던 사건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형제애와 정의의 정신에 진실되게 이끌린 사람
은 어느 누구도 '외부인'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우리 멤버 중의 한 명이 교회에 속하
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외부인이 공동체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행위
는 결혼의 가장 높은 단계인 성령의 일치와 연합에 상반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이 원
해서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 경우에는 본인만 배우자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결혼을 지
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결혼을 바라는 두 사람의 사랑이 성령께 헌신되고
그분의 지배와 감독 아래 놓일 때, 또 두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치와 정의를 섬길 때, 두 사람이 결혼하지 못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영적인 일치가
부족하다면 교회는 이런 결혼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 안
에서 신자들의 일치와 연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
시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성령 안에 있는 참된 결혼의 요구들
은 결코 인간적인 해답 체계로 충족되거나 훈련, 규칙,
규정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그 요구들은 성령의 일치
를 경험하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
라 살기 시작한 사람들만이 오직 일치의 빛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의 정수는 연합과 일치이다(요 1 7:20-
23).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로 이 일치를 위한 하나님
의 뜻이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이룬 일치의 열매들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삶의 물질적이고 실제
적인 측면도 영향을 받아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
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놓았
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지 않
을 수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당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고 누구나 필요한 것을 얻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빼돌려 놓는 사람이 없었다. 이 혁명을 통제
하는 어떤 법률이나 원칙도 없었다. 예수님조차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
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 9:21 ) 라
고 말하셨을 뿐이다. 오순절에 그 일은 너무 간단하게
일어났다. 성령이 강림하셨고 믿는 자들의 마음이 하나
가 되었던 것이다(행 2 :42-47).
성령은 우리를 편협함에서 벗어나
한 마음이 되게 하신다.
참된 일치는 기쁨이나 사랑처럼 강요나 인위적인 노
력으로 창조될 수 없다. 성령만이 일치를 가져 올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죄와 자기중심적인 편협함에서 성령만이 우리를 자유롭
게 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이런 권세들로
부터 어느 정도는 그리고 얼마 동안은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직 사랑의 성령만이 육체를 극
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
실을 잊지 말자(갈 5:25). 부부가 연합하는 기초가 성
령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나 공통된 가치관에
있다면, 그 결혼은 그저 성적이고 감정적인 욕구충족에
머무르고 말 위험성이 크다. 우리 혼자서는 두 마음이
하나가 되는 참된 영의 일치를 결코 이룰 수 없다. 참된
하나됨은 우리보다 위대한 존재가 우리를 사로잡아 변
화시키도록 내 맡길 때만 일어난다.
결혼이 성령 안에 닻을 내릴 때, 두 사람은 그들의
사랑이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사랑의 열매이며 선물이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고 해서 이기심과 불일치,
천박함이나 혼란 같은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
니다. 하지만 늘 성령께 마음을 열어놓는다면 성령께서
는 어김없이 오셔서 우리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바
라보게 하실 것이다.
이미 결혼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직 미혼인 사람에게
도 성령님은 거듭거듭 오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
에 있는 모든 것을 바꾸고 우리에게 사랑할 힘을 주기원하신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
게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
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사랑은 성령에 속한
것이며 오직 성령 안에서만 참된 결혼이 잉태되고 성령
안에서만 끝까지 지속된다.제9과
결혼의 신비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
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
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
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
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
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
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25-32
결혼과 가정은 교회에서 비롯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 자신의 사랑
과 정의를 나타내는 근원적인 표현이다. 결혼은 교회 안
에서 성취될 수 있고 그것의 참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교회가 없다면 결혼은 사회의 위압적이고 파괴적
인 힘들에 의해 압도당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결혼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속 이상이다.
우리 시대에 결혼이 남편과 아내의 결속보다 훨씬
더 깊은 신비, 즉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연합을 내
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참된 결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이보다 깊은 연합
을 반영한다. 이런 점에서 결혼이란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혼은 하나님과 그
의 백성간의 연합이라는 보다 깊은 결속에 의해 보증되
기 때문이다. 반드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결속이 우선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례식에서 서약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확인하는 바로 그 결속이다. 그리
고 모든 결혼식에서 우리 자신에게 이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가장 행복한 결혼조차 영구적인 열
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결혼의 결속이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나 계약
으로 끝나고 말 때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되는지 모른다.
만일 세상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교회
에 대한 충성을 결혼보다 중요시했다면 현대 가정의 상
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신앙을 가진 부부 사이에 그리스도는 참으로 연합시
키는 분으로 서 계신다. 남편과 아내가 막힘없이 서로에
게 접근할 길을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의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부부관계에 들어와 사랑의 진리를 흐려놓을 때 신실한 제자라면 자신의 변덕스러운 동반자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
감정적인 사랑은 이런 태도에 반대할 것이다. 그런
사랑은 진리를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심
지어 하나님에게서 온 분명한 빛을 가로막으려고 시도
할 것이다. 관계가 거짓되고 불순해졌을 때조차 감정적
인 사랑은 그런 관계를 단호하게 끝내지도 못할 뿐더러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결
코 악을 쫓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고전 1 3:6). 두 사람은 신앙의 일치가 그들 결혼의 감
정적인 결속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
야 한다. 자신이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첫 번째로 충성할 대상이 예수님
과 교회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눅 9:57-
60)
결혼한 부부의 연합이 보다 큰 교회의 연합 아래 놓
여 있을 때, 그들의 결혼은 새롭고 보다 깊은 수준에서
확고부동하고 안전하게 된다. 부부의 연합은 모든 믿는
자들의 연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
니다. 그렇지만 이 말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으며 나
는 그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지난 몇 해 동안 나와 서
로 잘 알고 지내온 우리 공동체의 해리(Harry)와 베티
(Betty)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해리와 나는 1 937년 6 월, 영국에서 결혼했습니다. 처음 우리는 교회의 연합 속에서 결혼을 했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갈등
이 시작되었습니다. 해리는 나에게 충실하지 않
았고 우리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몇 차례 남편은
상황을 바로 잡아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묶고 있는 죄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랜 별거 기간 동안, 공동체
안에 있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남편과 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지원이었습니다.
남편이 저를 힘들게 하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상심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가 남편을 도울 수 있
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마음을 잡곤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
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남편이 언젠가는 그리스
도와 교회로 되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남편은 공동체로 돌아왔답니다.
비록 노년이 되어야 돌아왔지만, 저는 지금도 이
기적 같은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곤 하
지요. 우리는 40년 넘게 떨어져 살았지만 함께
나눈 마지막 몇 해 동안 우리는 너무도 행복했습
니다. 남편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답니다. 겸손
해졌고 생각도 소박해졌습니다. 남편은 형제자매
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함께 읽고 남편이좋아하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남편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남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남
편과 함께 하던 시간은 항상 보석과 같을 것입니
다. 나는 그가 나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주 사랑하는데 실
패합니다. 그리고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채
뒤늦게 후회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
하시며 약속을 지키십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며 그래서 평안을 얻습니다.
베티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변치
않는 기도와 예수님에 대한 신실함이 없었다면 해리는
하나님과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고 아내에게 돌
아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함께 했던 마지막
두 해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치
유하고 변하게 하는지 생생히 증거하는 시간이었다. 오
늘날 많은 사람들은 결혼이 더 독립적이 되면 될수록 더
견고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화와 이 두 사람의 사랑
은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부
가 서로 '구속'하는 의무에서 해방되면 될수록 더 행복
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완전히 잘못된 억측
이다. 오직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세워지고 그의 사랑에
근거할 때 결혼은 영구적일 수 있다. 신앙이란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결혼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임무를 갖고 있으며
서로 보완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믿음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를 이
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분명히 하나님은 남녀 각자에게
다른 본성과 임무를 주셨다. 그리고 이것들이 결혼 안에
서 올바르게 성취될 때 조화와 사랑이 충만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 하인리히 아놀드(J. Heinrich Arnold)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인 구성에 있어 분명
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
이의 차이를 단지 생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유물론적입니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
는 자를 자신 안으로 흡수하길 갈망합니다. 여자
는 본성적으로 받고 견딥니다. 그래서 임신하고,
낳고, 양육하고, 보호합니다. 이와 반대로, 남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들어가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그는 받기보다 오히려 주도하고 꿰뚫고 나가도록
지어졌습니다.15
영혼은 몸을 모양 짓는다는 말이 있는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호흡이며 인간 각자의
가장 깊숙한 본질인 영혼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몸을 만
들어 준다. 누가 더 높거나 낮은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
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졌다. 이보다 더 위
대한 사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차이점은 있
다. 바울은 남자를 그리스도에 그리고 여자를 교회에 비
유한다(엡 5:22 -24). 남자는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봉
사를 묘사한다. 그리고 여자는 몸으로서 교회의 헌신
을 묘사한다. 가치에는 차이가 없지만 부르심에는 차이
가 있다.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한다.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여
자다움과 어머니다움의 참된 본성을 발견한다. 여자는
교회처럼 그녀 안에 말씀을 받고 운반하고(눅 1 :38) 하
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 안으로 생명을 가져온다. 그런
이유에서 여자는 교회와 같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숭고한 묘사이다.
여자의 사랑은 남자의 사랑과 다르다. 여자는 한결
같이 변치 않는 마음으로 사랑한다. 여자는 품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호하고 이끄는 데 있어 보다 헌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남자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을 도전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도들
의 개척자적인 사랑이다. "가서 사람들을 모으라!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
나님과 아들과 성령의 생명 안에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
라" (마 2 8:18-20). 그러나 남자의 임무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항상 교회의 임무와 함께 묶여 있다.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의 머리라고 바울은 말
한다(고전 11 :3). 이 말은 남자가 '더 높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취해졌고 여자가 남자
를 낳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든 측면에서 서로에게 의
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전 11 :11 -12 ). 한 사
람이 소유한 재능과 책임은 다른 사람의 그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다를 뿐이다. 결혼의 참
된 질서 속에서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바른 위치를 발견
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상대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랑과 겸손이 지배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회
피하는 것은 분명 죄다. 여자들은 임신의 불편과 출산의
고통을 거부한다. 남자들은 아빠가 되어 자녀들에게 헌
신하는 부담 그리고 그런 자녀들을 낳는 아내에게 헌신
하는 부담을 거부한다. 그런 거부는 우리 시대에 내려진
저주이다. 이런 태도는 다음 세대들을 타락으로 인도할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에 의해 자녀를 갖도록 지음받았
다. 그리고 참된 남자는 이로 인하여 그 무엇보다 아내
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다
음과 같이 권고한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
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가 절대적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참된 여자 안에는 용감한 남성다움이 있다.
그리고 참된 남자 안에는 마리아의 복종과 겸손이 있다.
하지만 남자는 머리이기 때문에 올바른 부부관계가 되
기 위해선 남자가 혹 나약한 사람일 경우라도 가정을 이
끌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남자는 전제 군주이고 여자는
시종이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만일 남자가 사랑과 겸손
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가 예수님의 성령 안에
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의 리더십은 폭군처럼 될 것이
다. 머리는 몸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권세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결혼식에서 신랑은 '모든
일에서 선한 길로' 아내를 기꺼이 인도하겠냐는 질문을
항상 받는다. 이 질문은 아내를 예수님께 더욱 깊이 인
도하겠냐는 뜻이다. 같은 방식으로, 신부는 자신의 남편
을 기꺼이 따르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은 다름 아닌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이다.
참된 리더십은 사랑의 섬김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참된 리더
십 안에 있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지적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 5:25). 이 사랑하라는 임무
는 실제로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남자와 여자의 임
무이다.
바울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겨듣는다면, 사랑이 지
배하는 진정한 내적 연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직
그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결혼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는 자의 새로운 모습
을 탐구할 것이고 계속해서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는
길들을 찾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
가 영원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은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 앞에서 맺어진 그리고 교회의 축복으로
인봉한 결혼의 행복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
까? 두 믿음의 사람들이 동일한 희망, 동일한 삶
의 길, 동일한 충성의 맹세, 동일한 하나님께 대
한 섬김 안에서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멍에인지! 그들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그리고 영
혼과 몸의 분리 없이 한 몸처럼 섬깁니다. 한 몸
이 있는 곳에 또한 한 정신(spirit)이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무릎을 꿇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서로를
참아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함께연합합니다. 주님의 만찬에서 연합합니다. 불안,
박해, 회복 중에 연합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섬
기는 일에 서로 열심을 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
는 보고 들으시며 주님의 평화를 그들에게 기쁘
게 내려 주십니다. 두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함
께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기 때문
입니다.16제10장
성의 신성함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
님이 심판하시리라.
히브리서 1 3:4
성에 대한 두 가지 위험한 태도가 있다. 첫째는 육
체적인 관계가 요구하는 자기 포기와 친밀감을
두려워해서 성은 추하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태도이
다. 또 하나는, 이것과 상반되는 태도로 무절제한 성적
욕망과 죄이다. 성적인 영역은 타락에서 예외가 아니다.
성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동떨어진다면 축
복이 되어야 할 부부간에도 위험이 될 수 있다. 벌거벗
은 욕정이 순수한 열정을 대신하고, 폭력과 심지어 잔인
함이 상냥함을 대신하고, 통제할 수 없는 욕구가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주는 포기를 대신한다.
교회는 이런 현상에 대해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된다
(고후 5:1-5). 순결하지 못한 정신은 우리를 유혹하려
고 항상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그것에 문을 열어 줄
때마다 결혼의 지성소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 올 것이다.
일단 불결함이 결혼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랑에초점을 맞추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서로를 회
피하고 악한 유혹들에 굴복하기가 점점 더 쉬워진다.
이 음란의 영의 위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
다. 이 영은 결혼한 부부일지라도 죄악으로 몰아가고 만
다. 일단 음란한 영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성은 순식간
에 고귀한 속성을 상실하고 천박한 것으로 전락하면서
원래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창조되었던 것이 삶을 파
괴하는 사악한 경험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오직 회개만이
치유와 회복을 가져 올 수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연합이 일어난다.
성적인 영역의 신성함을 하나님의 재가로 맺어진 부
부사랑의 성취라고 볼 때에만 우리는 성의 참된 본성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말은 부부의 사랑이
육체적으로 가장 풍부하게 표현되는 순간인 성 관계 자
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 관계는 강력하고 극적인
경험인 만큼 하나님 안에 단단히 닻을 내리고 있지 않으
면 안 된다. 만일 성이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고 하나님
아래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우상이 될 수 있
다. 하지만 경외심을 갖고 접근한다면, 성은 "인간의 마
음속에 가장 친밀하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상처 입기
쉬운 무언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17올바른 결혼생활에서는 성 관계가 상대방에 대한 욕
망으로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사랑으로 시작한다. 각자 상대방에게 자신을 완전히 포
기하고 내어 줄 때 무엇과 견줄 수 없는 깊은 연합이 이
루어진다. 그것은 그저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완전
한 사랑의 표현이며 성취이고 무조건적인 내어줌과 깊
은 만족의 행위이다.
자신을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놀랍고
굉장한 경험이다. 육체적인 일치의 절정인 오르가즘은
강력하고 떨리는 경험이며 인간의 영에 강한 영향을 준
다. 이 몸의 경험은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을 영
의 경험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과 몸의 조화로운
융화 속에서 두 인간 존재는 최고조의 사랑의 기쁨에 도
달한다. 완전한 결합 안에서 두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벗고 가능한 가장 친밀한 공동체로 결합된다. 절정의 순
간에 개인은 사라지고 두 사람이 서로 완전히 융화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개인이란 느낌 자체가 잠깐이나마 그
하나됨의 기쁨 속에 잠겨버린다.
육체적인 결합은
언제나 마음과 영혼의 일치를 표현해야 한다.
부부간의 행위에 대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경외감
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주제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물론 부부간에는 아
주 은밀한 것까지 서로 나눌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 없이 경박하게 이
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예
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필요를 언제나 아신다. 우
리는 그에게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도를 구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
리를 인도하실 수 없다. 하루를 시작할 때에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우리의 결혼이 예수님과 그의 사랑과 순결에 근거
한다면, 우리는 모든 수준에서 서로 바른 관계를 발견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
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
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 -27).
기도는 결혼 관계 안에서 떠오르는 차이를 화해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영혼의 하나됨이 없는데 육체적으로 하
나 되는 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사랑의 결속을 모독하
는 것이다.
육체적인 일치는 언제나 마음과 영혼의 충만한 일치
를 표현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만족만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는 서로 자신을 내어주는, 서로를 위해 살기
로 결단하는 증표이다. 여기에는 성을 힘과 지배 논리로
11 0
보는 생각이 끼어 들 틈이 없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배우자를 단지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
엄과 배우자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
관계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
로 성경에서 남자가 절정 전에 아내 몸에서 나와 "땅에
사정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이유이다(창 38:9-10).
물론 조루나 몽정과 같이 이런 일이 의도하지 않은 채
일어났다면 죄는 아니다. 또, 똑같은 이유로 구강성교나
(oral sex) 항문성교 또한 죄악이다. 이런 형태의 섹스
는 단지 성적인 흥분을 위한 이기적인 욕구에 의해 이뤄
지기 때문에 사실상 일종의 상호 자위행위이다.
참된 성적인 충족은 서로 복종할 때 일어난다.
신혼부부에게 있어 성적인 욕구는 비교적 잠자고 있
는 편이다. 특별히 두 사람 모두 혼전 성 관계나 자위행
위에 중독된 경험이 없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럴
경우 남편은 아내에게 육체관계에 대한 욕구가 생기도
록 일깨워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남편은 큰 인내심을 갖고 오직 아내가 준비되었
을 때 성적인 결합을 주도해야 한다. 처녀에게 있어 첫
성교는 고통스럽고 미량의 출혈을 야기할 수 있다. 이것
이 절대 놀랄 일은 아니지만 남편은 아내의 불안한 마음
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한다.진정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성급하게 관계를 서두
르지 않고 아내의 준비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배려
를 해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만족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가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종 남자보
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육
체관계 후에도 아내가 깊은 실망이나 좌절을 느끼며 잠
못 이루고 있는데 혼자 행복한 꿈나라로 가지 않는다.
여자의 성적 만족은 남자와 달리 관계를 갖는 분위
기에 상당히 좌우된다. 즉, 남편과의 일치감, 남편의 사
랑에 대한 확신, 작지만 다정하게 말해주는 사랑의 표현
들이 아내가 만족에 이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
의 만족은 남자처럼 절정의 순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아내
는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부부는 육체적인 하나됨을 위해 서로 자극하고 준비
시키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애정이 깃든 자
극은 서로의 일치를 강하게 확인시켜주며, 게다가 준비
를 도와주고 신뢰를 키워주며 안전하다는 느낌으로 부
부를 감싸준다. 남편과 아내 모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
고 자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자에 관한 글에서 폰
가건(von Gagern)은 이렇게 말한다. "몸에는 애무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 입술, 가슴, 팔 아래, 척추
-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부부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다양하고 독특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8자기 절제와 금욕으로 부부의 사랑은 깊어질
수 있다.
육체적으로 볼 때, 관계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남편
은 아내의 건강을 위하여, 특별히 출산 전후에 금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는 월경 기간과 적어도 출산 6 주 전부터 금욕을 권고한
다. 출산 후 부부들은 가능한 오랫동안 부부 관계를 절
제해야 한다. 그래야 산모는 육체적, 감정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다르기 때문에 그 기간을
어떤 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고려
하는지의 여부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참으로 생각한
다면 기꺼이 가능한 오랫동안 금욕을 통해 자신을 절제
할 것이다(살전 4:3-5). 그 금욕 기간 동안 아내는 남
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을 성적으로 흥분시키지 않
도록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부부는 늘 함께 생활하고 자고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사람과는 달리 욕구를 자제한다는 것
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부는
서로 성적으로 가까워 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적으로 절제하는 것이 좌
절감을 줄 뿐이라며 아예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
은데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
는 마음에서 절제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관계가 더욱 깊
11 3
어지고 풍성해지기까지 한다. 어떤 경우에는 치유하
는 효과가 있다. 한 부부 사역 단체의 대표인 존 키플리
(John Kippley)는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했던 한 여성
이 남편의 배려를 통해 어떻게 치유를 경험했는지 사례
를 든다. 그 여성은 존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를
위해 절제하는 남편을 보면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육체 이상의 어떤 존재란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성행위 같은 게 없이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지요. 그때 비로소 저는 성적 만족의 대상이 아니
라 한 인격으로서의 참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여성이 중년에 접어들 무렵 성 관계에 대한 기쁨이
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것은 남성에게 있어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남편은 아내를 향한 사랑이 감소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
울여야만 한다. 아내 입장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성교의
기쁨이 예전만하지 않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사랑으
로 남편의 요구에 응해주어야 한다(고전 7:3-4).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남편은 자신의 성적인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출구들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중
요한 것은 육체적인 결합 전에 항상 영과 영혼의 일치가
있느냐 그리고 금욕이 필요할 때 사랑이 식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만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
11 4
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그러므로 성적으로 금욕할 때는 자신을 다스리기 위
해 늘 금식과 기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금
욕이 자발적으로 행해진다면 부부간의 사랑은 예전보다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끝으로, 결혼에 있어 모든 문제들은 두 사람이 예수
님께 헌신되었는지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었는지에 달려있다. 부부는 그들을 하나로 묶
으신 분이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때에 그들을 함께 지
키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누
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눅 9:24).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결혼 안에서도 진
리이다. 두 사람 모두가 그들 자신을 거듭거듭 서로에게
그리고 그리스도께 기꺼이 내어 주는 한, 그들은 참된
일치와 풍성한 자유를 발견할 것이다.
11 5
제11장
부모됨과 자녀라는 선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
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
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 :1-4
우리는 지금 부유한 나라나 빈곤한 나라를 막론하
고 가족 자체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족을 안정되고 결속된 단위로 보던 개념은 빠르
게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서로 자극하
는 것이 싫어서 다들 가정이 무엇이냐를 정의 내리기조
차 두려워한다.
지난 수년간 심리학자들이 가족붕괴와 십대임신, 가
정폭력, 그 밖의 사회적 병리현상들의 악영향을 경고해
왔지만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그 쓴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 모든 현상들을 지켜볼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그리고 축복으로 그들에게 자
녀를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재발견하는 것은 우리
에게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19오늘날 자녀를 갖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가족을 경멸한다. 단적인 예로 자녀가
여럿 있는 가족은 집을 구하기가 어렵고, 어떤 지역에
서는 심지어 자녀가 하나만 있어도 집을 임대하기가 불
가능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유 없이 거부당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녀를 갖게 되면 직업이나 그 외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다. 그리고 보다 '인정받는' 직업을 찾아 나서는 대신 자
녀를 키우려고 가정에 머물기로 선택한 여성들은 종종
무시를 당한다.
이 시대에 자녀를 갖는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가 필
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이 의미하는 바로, 앞
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결정하신다고 신뢰하는 것이
다. 이 시대를 사는 부모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사회의 건강은 (그리고 그 사회 안에 있
는 교회와 모임의 건강은) 그 사회의 결혼이 얼마나 튼
튼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에는 강하고
안정된 가족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실되는 순간 가
족은 신속하게 분열되고 쇠퇴한다.
난생 처음 어린아이의 미소를 보는 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를,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그 아이가 보
답하는 사랑의 느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의 위대하심과 어린이 각자 안에 영원(eternity)이 가
11 7
까이 있음을 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어느 누구
와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들의 마
음속에서 이들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또한 자녀를 세상에 낳는 것이 얼마나 경외심을 자아내
는 책임인지 깨달을 것이다. 그 책임은 오직 자녀와 함
께 자라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도 연약하고
악해서 단 한 명의 자녀조차도 자신들의 힘으로 키울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 자격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
은 우리가 얼마나 은혜에 의존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서있
는 어른만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적합하다.
가족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처음으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어떤
토대 위에 세울 것인가?' 물어야 한다.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어야 한다. 오직
그분 위에 우리는 외부로부터 공격해오는 세력들을 거
뜬히 이길 수 있는 가족을 세울 수 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창조자를 보
여주는 것은 모든 부부의 임무이다. 특별히 어린 자녀에
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바로 그런 이
유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가정교육에서 절
11 8
대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
님을 경외하라는 명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 모든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에게 본능적으로 안전
을 갈망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이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때, 자녀들이 보기에 부모가 단지 의무감에서 부모 노릇
을 할 뿐이지 참된 역할을 다 하지 않을 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 위선이 일어날 때마다 자녀들은 그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은 화를 잘 내
고, 냉혹하고, 반항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며 산다면,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이
가족의 머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원하지 않는다
면, 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일이 벌어진다. 자녀들은 부모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장래 자신들의 삶을 위한 안
전하고 건강한 토대를 발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심
지어는 감정적인 어려움들을 경험할 수도 있다.
최근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부부를 상담한 적
이 있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생각이 바른 사람들이
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정의 크고 작은 문제를 결정
하는 데 있어 서로 고집을 부렸고 다툼이 그치질 않았
다. 손님이나 외부인의 눈에 비쳐진 가족의 모습은 화목
하지만 가족 내부에는 긴장과 다툼이 자라고 있었다. 자
녀들이 성장하면서, 부모의 불일치는 너무 심화되어서
자녀들을 합당하게 인도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따라야 할 좋은 모델이 되지 못했다.
11 9
지금 그 자녀들은 성인이 되었다. 그들 모두 사랑스
럽고 총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성격에
모난 데가 많아 관계성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
다. 부모들에게서 서로 신뢰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화목
한 부부관계를 보지 못하고 자랐기에 이들도 다른 누군
가를 신뢰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부
모들의 영향으로 이들은 자신들에게도 솔직하고 정직하
지 못한 데다 매사에 자기들 맘대로 하지 않으면 못 배
기는 고집쟁이들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태도가 자신들
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단절시키고 그래서 자신들이 외
롭고 환멸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기대들을 갖고 세상 때문
에 자신들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출생 첫 날부터 자녀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
감으로 둘러싸이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느끼는 만큼 자녀들은
성장하는 데 필요한 내적인 안정을 발견한다.
훈계에 관해서는, 행동 면에서 남편과 아내가 기대
하는 바를 서로 완전히 합의하는 것이 최선이다. 자녀들
은 어느 부모가 옳은지를 결정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자녀들은 신뢰할 뿐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찾는
것은 원칙의 일관성과 일치와 사랑과 상호 존중에서 비
롯된 안정감이다. 이런 것들은 자녀들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12 0
자녀들은 종교적인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범이 필요하다.
아이가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가 인격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가 부모들이 아이들
에게 생명력 있는 복음과 예수님을 전할 최적의 시기이
다. 이런 일은 그저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만으로도 가능하
다. 아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일지라도 이런 이야기에 마
음이 감동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
트게 된다.
하지만 부모에게 예수님이 단지 성경 속의 한 인물
에 불과하다면 아이를 예수님께 이끈다는 것은 당치않
다. 아이들은 부모가 아니더라도 예수님께 가고 싶어 한
다. 하지만 껍데기뿐인 거짓 신앙에는 본능적으로 반항
한다.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지적했다. "어른들이 생명
력 없는 종교를 가지고 아이들을 억지로 하나님 나라로
끌어당길 때, 아이들은 이런 위선적인 가정에서 온 힘을
다해 도망치려 할 것이다."20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어떠
한 종교적인 압력을 가하거나, 아이들이 이해할 수도 수
용할 수도 없는 죄에 관한 이야기로 병들게 하지 않도
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
경을 향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갖길 원한다. 하나
님께서 그들의 작은 마음속에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짧은 성경 말씀일지라도 그것을 암송시키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
고' 노력하기보다는 부모가 일상생활에서 진실되게 신
앙대로 사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좋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볼
때 -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명령들을 순종할 때
- 자녀들은 기도하고, 또 그들의 방식으로 그분을 따
르고 싶은 내적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길잡이(guide)이지
조종하는 자(control)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징계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
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 아이를 양육
하는 일은 안내하는 것이지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
니라는 점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자제하는 능력
을 기르도록 북돋아주고, 아주 어린 아기 때부터 자신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도
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제 기분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다 받아주어선 안 되는 것이다. 분명
한 지침을 세우고 일관되게 한계를 그어주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다. 사실, 징계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다
(히 12 :10-11 ). 하지만 휘두르거나 강요하는 것은 결
코 사랑이 아니다.우리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아이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두고 계신다(시 1 39:13-17)는 것을 염두에 두
면서, 왜 "아이들이 그들을 이끌 것이다"(이 11 :6)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녀들
을 인도함에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도나 계획에
따라 그들을 만들려고 시도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타고나지 않고 아이들 내부로부터 깨
어나지 않은 것,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지 않은 무엇
을 하라고 아이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각
각의 어린이에게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목적을 붙
드실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각각의 어린이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도록 돕
는 것이다.
이 임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
력으로 아이들을 이끌어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포기
하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것은 자녀 스스로
생각하는데 방해가 되는 행동을 삼간다는 뜻이다. 블룸
하르트는 우리가 자녀들의 생각이나 좋아하는 취향이나
시도에 끼어 들어 우리의 생각이나 충고로 어떻게 해보
려고 할 때 우리와 아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빨리 상처를
입는지를 지적한다. "간섭과 방해가 없을 때, 자녀들은
순종과 존경을 가장 잘 배운다."21
물론, 부모들은 아이들의 응석을 무조건 받아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종종 부모들의 이런 유약한 태도
12 3
는 자녀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감정적 집착의 열매이다.
이런 태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을 방해한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분명한 태도를 잃은 어른의 줏대 없는 모
습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그러한 거짓된 애착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
도록 늘 조심해야만 한다.
참된 권위는 자녀를 강하게 하고 자극한다.
날카로운 지적이나 훈계를 받을 때 자녀들은 절대
학대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스스
로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잘못된 일을 했을 때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면해 보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
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어느 정도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람
직하지만 성급한 태도는 결코 옳지 않다. 특별히 성급하
게 신체적인 체벌을 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파산 선고'라고 지
적했다.
우리는 가혹한 체벌을 반대한다. 또한, 위압감을 주
어 심적으로 교묘하게 휘두르려는 정신적 폭력도 반대
한다. 두 행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자로서
자녀를 신중하게 다루는데 실패한 권위주의의 행태들
이다. 가혹한 체벌은 자비를 상실한 것이고, 정신적 폭
력은 정직을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사랑을 상실
12 4
한 것이다. 참된 권위는 자녀들이 옳음과 그름 사이에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인도하므로 그들 각자 안에 있는 선
한 것을 자극하고 강화한다. 오직 신뢰와 사랑으로 자녀
들을 인도할 때 아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악과 대항하여
싸우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꼭 필요할 때에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셨는데, 나는 그런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나는 때때로 아버지의 엄격함에
반항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이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
의 표시였음을 알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님
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우리 자
녀들 안에 조금씩 가르치셨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늘 우리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존경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불
순종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분의 지혜를 깨달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지
만 특히 아이가 어리거나 아플 때 돌봐야 할 부담이 더
무겁기 때문에 아버지로서는 어머니의 권위를 세워주어
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엄격한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녀
들에게 위협적인 느낌을 주신 일이 한번도 없었다. 어
떤 잘못한 일 때문에 꾸중을 들을 때마다, 일단 내가 책
임을 수용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면 나는 아버지의 완전
12 5
한 용서와 사랑을 기대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했던 잘
못이 잊혀질 것이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권위, 즉 사
랑의 권위의 중요함을 내게 보여주셨다. 어린이 각자의
마음속에는 '안돼'가 필요할 때 '안돼'라는 말을 듣고 싶
어 하는 갈망이 있다. 그리고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을
알았을 때 그 갈망은 상황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참된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에게 내적인 안정을 준다. 그것은
견고한 울타리가 제공하는 안정감을 자녀에게 제공하
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참된 부모가 되는데 실패
할 때 자녀들뿐만 아니라 부모 또한 고통을 겪는다. 부
부가 하나님의 인도와 용서를 발견하려면, 기도로 그것
들을 구하고 신뢰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도움을 청해
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자녀의 교육을 교회에 위임하는
행위로 인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희생되어선 절
대 안 된다. 자체 교사를 두고 있는 우리 브루더호프는
공동체는 그런 위임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종종 강화
시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위임은 한 가족이 줄 수 있
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한 사랑의 안정을 자녀에게
주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키우
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이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린아이들처럼 되라고 부
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의 온 마음
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자녀
들은 당연히 부모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
고 우리 또한 자녀들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간다는 놀라
운 신비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
모와 자녀 사이에서 움직이는 성령을 경외하는
것은 참된 가정생활의 기본 요소입니다.22
12 7
제12장
어린 시절의 순결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
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
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
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 8:4-6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의 영혼에
얼마나 위대한 가치를 두고 계신지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볼 때,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마음 가까이 있다. 그리고 모든 어린아이 곁에는 "하늘
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마
18:10) 수호천사가 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아기는 천국의 순결한
공기를 함께 가져오는 것 같다.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하나님께 속한 무언가가, 영원에 속한 무언가가 우리에
게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12 8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은 보호되어야 하며,
동시에 북돋아 자라게 해주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 안
에는 죄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잠 22 :15). 그런 이유
때문에 어린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끔찍한 죄
가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을 고의로 잘못 이끌어 죄짓게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둘러싼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파괴하고 아이들에게서 어린아이다움을 빼앗는 어떤 환
경에 노출시키는 것도 아이들을 더럽힐 수 있다. 오늘날
집에서 시청하는 TV에서, 쇼핑 몰에서, 학교에서 어린
이들에게 노출된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은 성과 폭력과
권력과 돈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아
이들이 어린 시절에 이미 어린아이다운 심령과 어린시
절 자체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
이 살고 있는 분위기 전체를 순결의 정신으로 채우고 사
랑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하나님과 부모
와 선생님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도
록 인도하는 임무는 거룩한 특권이다. 우리 자녀들이 순
결하고 참되고 진정한 것에 뜻을 두도록 성령님께 간구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한 일을 하도록 자
녀들을 인도하는 것이 그들에게 성경 구절을 암송시키
거나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암송하도록 가르치는 것보
12 9
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브루더호프 공동체 안에
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형식적인 종교 교육을 피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간단한 노래와 성경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주변 어른들의 모범을 통
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장 잘 배울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인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
리 어른들이 먼저 예수님의 명령과 말씀과 천사들의 세
계와 성경 전반에 대해 온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갖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얼마나 빠르고 단순하게 이런
것들을 마음에 수용하는지 모른다!
또한 아이들을 둘러 싼 세상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들 - 태양, 달, 별 안에서, 새와 동물들, 나무와 꽃들, 산
과 천둥 - 속에서 아이들이 하나님을 느끼도록 돕는 것
도 아이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아이
는 자연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 원한다. 그
리고 아이들 속에는 지구에 대한 사랑과 별이 빛나는 하
늘에 대한 기쁨 그리고 모든 생물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천사를 훨씬 현실적이고 가깝게 느낀다.
자연과 성경을 통해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
람들을 마음에 품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중요
하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이 고민하고 겁먹지 않도록 하
는 것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생식, 출생, 죽음과 같이 생명의 순환에 관한 너무나 많은 지식은 하나
님의 세계에 대한 어린이의 내적인 경험을 해칠 수 있
다. 출생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말은 그것들의
경이로움을 해칠 위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임신과 출산에 보다 큰 경외
감과 경이로움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산고 중의 어머니 그리고 온갖 고
통과 사투 끝에 얻은 새 생명이 주는 형언할 수 없는 기
쁨과 비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부가 출산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곳에는 언제나 깊은 신비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임신에 관한 농담이나 지나친 관심은 당
사자들에게 언제나 내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힐 수 있
다. 잠잠하고 겸손하게 아기를 기대하는 태도는 하나님
의 선물인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자녀들 안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할 것이다.
특별히 성과 관련해서, 어린이나 심지어 청년들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지나친 토론과 노출은 우리
자녀들이 생명에 대해 갖는 신성함과 신비감을 아주 쉽
게 파괴시킨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성에
미친 문화의 교활한 위험들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들
은 너무도 쉽게 우리가 보고 듣고 읽는 것들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자녀들을 삶의 기본적인 사실들에 무
지한 사람으로 키우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단지 내가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런 사실들을 절대로
분리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순결,
즉 모든 어린이들이 그들의 창조자와 맺는 자연스런 관
계를 휘저어 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육이란 자녀가 악을 이기고
선을 선택하도록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의 순결을 보호한다는 말은 그들이 선한 일
을 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악에게 유혹을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그
것이 거짓말이나 도둑질, 무례함, 성적인 타락 등 어떤
형태이든 자녀들 안에 있는 악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
어야만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규칙을 가지고 싸워선
안 된다(골 2 :20-22 ). 의심과 불신을 항상 동반하는
도덕주의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을 파괴한다. 순종한
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고분고분함
만으로 어린아이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
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아이를 무방비 상태로 방
치해서 떠다니는 악의 손아귀에 잡혀 먹이가 되지 않도
록 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의 잘못을 장황하게 끊임없이
이야기해서 기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 참된 교육은 끊임
없는 비판으로 어린이를 틀에 짜 맞추거나 억압하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악을 이기고 선을 선택할 수있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녀들을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
도록 주의해야 한다. 응석은 이기심, 자기 통제력 결핍,
깊은 욕구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말로 하면 죄로
유인한다. 자녀의 응석을 받아주는 부모는 종종 사랑과
애착 관계(emotionalism)를 혼동한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매달려 있으면 그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자녀들이 건강하고 독립적
인 존재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자신의 자녀
들을 감정적인 소유물로 대하는 것은 자녀들을 그들 나
름의 권리를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하는 마
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좀더 나이 든 아이들에게서도 친구나 선생님, 부모
님께 무례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무례함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는데, 남자아이들 사
이에서는 깡패 같은 행동(이런 행동은 상대가 있을 때
에만 나타나며 대부분의 경우 그런 사람 내부에는 겁쟁
이가 숨어있다),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불
손한 행동, 파괴적인 행동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또
한 노래 부르기는 계집애 같은 행동이라고 깔보고 아기
에게 애정표현을 하라고 하면 비웃는다. 그리고 종교적
이고 도덕적인 일들을 조롱하고 무시한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종종 가시 돋친 험담이나 수군거림, 은밀하
게 속삭이기, 비판에 대한 과민 반응과 같은 형태로 나
타난다.이런 경향을 보이는 어린이들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또래들의 압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패거리를 지어 몰
려다닌다. 부모와 교사는 이런 경향을 예의 주시해야 한
다. 아무리 악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패를 갈라 서로 배
타적이 된다면 결코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패 가르
기를 막는 최선의 대책은 아이들 각자 모두에게 진심어
린 관심을 가지고 돌보며 지도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선한 양심을 갈망한다.
어린아이의 성적인 불결함의 문제는 특별한 주의와
분별력을 요한다. 나의 부친은 이런 글을 남기셨다.
어린이의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매우 어
려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주로 신체 노출이나
접촉을 통해 음란한 마음이 들 때, 아이들은 본능
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 보통은 거짓말이 따라옵니다. 이럴
때 어른들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서 오히려 아
이들이 성적인 부분에 더 관심을 갖지 않도록 주
의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처방은 한번 아이들을
훈계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감하고, 다른 것에 관
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많은 문제에 있어 어른
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마음에 어른들
의 생각과 느낌과 경험을 투사하지 말아야 합니
다(딤 1 :15). 또한 어린이들이 성적인 호기심을
갖는 시기를 필수적으로 통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이 순결하고 순진무구한 영
혼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질문은 자녀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점점 더 거짓말에 빠져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나 청소년, 특별히 성적인 영역에서 과
오를 범한 아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매
우 부당한 짓입니다. 어린이의 과오를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어린이의 성품이나 장래 모습에 대
하여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경계해
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새로운 관심을 발견하
고 새 출발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
니다.
어떤 아이일지라도 양심에 호소한다면 그 마
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순결한
양심에 대한 본능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갈
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의 가책 때
문에 그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이 갈망을 지원
해 주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순간이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순
간, 그들은 어린아이이기를 멈춥니다. 이럴 때 부
모와 선생님의 임무는 그들이 회개하고 십자가
에 달리신 예수님을 경험하며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받는 경험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상실된
어린 시절은 십자가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습니
다.23
순결은 불결함과 마찬가지로 모범을 통해 배운다.
부모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자녀들과 신뢰관계를 세
우는 것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5, 6 세가 되어 문제가 가시화 될 때까지 마냥 기
다리고 있어선 안 된다. 자녀들이 아주 어릴 때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사춘기와 동반되는 더 심각한 문제
들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신뢰와 존경을 결코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물론 1 3세부터 21 세 사이의 시기는 특별히 중요한
데, 그 이유는 자녀들이 이 시기에 점차적으로 성적 영
역에 눈을 뜨기 때문이다. 이때 부모들은 십대들에게 무
관심하거나 십대들의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기가 쉽다. 만약 부
모들이 십대들과 좀더 시간을 보내준다면 우리나라 고
등학교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까! 수많은 부모들이 술
과 마약과 섹스에 대해 십대들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그들이 최신 비디오를 시청하거나 쇼핑 몰을 서성이는 대
신 자신들의 흥미를 찾아 창의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도
록 정기적으로 만나 그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는 부모들
은 얼마나 될까? 헌신된 부모라면 자녀들이 사춘기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통과하는 동안 그들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친구가 돼주어야 한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
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부모이든, 목회자이
든 상담자이든 친구이든, 믿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기쁨
과 갈등을 나눌 수 있고 수치심이나 거북함 없이 성 문
제에 관해 공개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만 한다.
오늘의 십대들은 너무나 많은 선택들에 노출되어 있
다. 우리 문화는 다양성이 자유의 열쇠라고 믿지만 그것
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혼란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십대들에게 헌신 없는 성행위가 가져오는 고통스
런 상처들에 대해 경고해주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하다. 그리고 실패한 그들에게 용서의 희망을 말해주는
사람은 더욱 찾기 어렵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는 특별히 신뢰할만한
역할 모델이 필요하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
고 맞벌이 부부의 증가가 공통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어떤 전문가들이 오늘날의 어린이들을 '나 홀로 세대
(Generation Alone)'라고 명명한 것이나, 어린이들을'버려진', '소외된', '고독한'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한 것
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순결이란 불결함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도 모범을 통해 배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딛
2:6-8). 어린이들은 부모 사이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눈길과
접촉과 애정 표현은 결혼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적합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육체적인 친밀함이란
결혼에만 속한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혼전 성 관계는 이
후의 결혼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린이들
은 그들 주변의 어른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와 성적인 죄
로 인해 야기된 혼란과 고통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
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교회가 가정생활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들은 부모 안에서 뿐만 아
니라 그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 안에서, 기혼자이든 미
혼자이든 간에, 순결의 살아 있는 모범들을 볼 수 있어
야 한다.
죄를 이기는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사랑이다.
순결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
리의 어린아이와 젊은이는 예수님을 그리고 평화와 사
회 정의에 대한 그분의 대의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
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그분의 대의로 고무될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악에 저항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인식하도록 지도할 때, 그들은 사랑 안에
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길 갈망할 것이다. 어린이들
은 사회의식이 없고 고통이나 세상의 악을 느끼지 못한
다는 생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진실이 아니다. 이런 일
은 오직 아이들만의 만족과 욕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할 때 일어난다. 제
대로 자란 어린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마주 할 때
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확장하고 싶은 내적
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죄를 이기는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사랑이다. 사랑
은 완벽한 일치 안에서 모든 덕을 하나로 묶는다(골
3:14). 사랑은 우리가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주어야
할 메시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야 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익
을 위해 살아간다. 그들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스포
츠에서 탁월해지기 위해, 장학금을 얻어 인정을 받기 위
해 열심히 노력한다. 물론 모두 칭찬할만한 일이다. 그
러나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웃이나 그들 주
변 세상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가? 우리는 우리의 젊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른 신앙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도록 그들을 도전하고 자극해야 한다.
종종 부모들은 불안에 떨며 성적인 타락이나 폭력으로부터 십대 자녀들을 격리시켜 보호하려고 한다. 하
지만 정작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가 아니라 아이
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소신 있게 주장할 수 있
는 기회이다.
우리 자녀들은 그들 나이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다가가서 배워야 한다. 그들
은 또래들 그리고 이 시대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경
제적 이슈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들은 마약과 알코
올에 빠진 사람들의 절망을 그리고 가정 안에서 폭력적
인 관계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한
다.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들과 관계 맺을 수 없다면, 그들은 자기 주변 세계와 진
정으로 접촉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 자신의 확신을 시험
해볼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녀를 완벽하게 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끔찍한 타락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지도와 훈계에 반응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잠 22 :6). 우리가 서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녀
들과 함께 나아갈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싸움, 때때로 심각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
렇지만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그 싸움은 언제나 해볼 만
한 가치가 있다. 장성한 자녀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선택했던 것과 다른 인생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날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인도
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제13장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누구
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
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
게 본이 되어.
디모데전서 4:8, 12
오늘날 젊은 남녀들이 이기적인 마음이나 지나치
게 순진한 태도를 가지고 이성교제를 시작하거
나,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결혼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남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끌림이나 우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일까? 어떻게 하
면 젊은 남녀들이 우리 시대의 천박한 에로티스즘에 영
향을 받지 않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자연스런 관계를 발
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결혼의 책임과 요
구에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준비시킬 수 있을까?
통속적인 데이트는 헌신의 의미를 값싸게 만든다.젊은 남녀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고 생활 가운데 긍
정적인 상호 교류가 일어나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뭔
가 잘못될지 모른다고 지레 두려워하는 것은 바람직하
지 않은 태도이며 불신의 표시이다. 젊은이들은 함께 일
하고, 대화하고, 노래하고, 휴식할 수 있는 또래 모임 안
에서 서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둘만 따로 떨
어지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
하며 부적절하다. 교회 안에서 젊은 남녀들은 먼저 형제
와 자매로서 서로를 알아야 한다. 젊은이들은 반드시 우
정에 대한 모든 종류의 험담이나 억측이 배제된 상태에
서 함께 만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험담이나 억
측으로 야기된 압력은 자유를 방해한다. 그것은 관계 안
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왜곡하고 훼손한다.
꿀벌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듯, 젊은이가
이 사람 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형적인 미성
숙의 표시이다. '꼭 맞는 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은 자연
스런 일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
깨뜨리는 행위를 교회는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남
녀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자유분방하게 훌쩍 옮겨
다니는 태도는 절대로 옳지 않다. 이런 행위는 양심을
무디게 만들고 헌신의 의미를 값싸게 만든다. 모든 남녀
간의 우정에서 감정적인 매력이 파도처럼 동반되는 것
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으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공동체는 통속적인 데이트를 거부한다. 요즘 시대에 데이트는 일종의 게임- 육체적이
고 감정적인 매력에 근거해서 남자나 여자 친구와 짝짓
는 의식 - 이 되어버렸다. 요즘 데이트는 우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 위에 세워져 있으며 종종 진정한 사랑이나
정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 데이
트는 개인의 '이미지'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몰두가 그
원인이다. 그리고 섹스가 수반될 때 커다란 상처를 양
심에 남기고 그것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
허영과 천박함은 통속적인 데이트와 늘 함께 간다.
자신에게 관심을 끌어 성적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희롱
행위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희롱은 내적인 불안과 불행
을 드러내며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통속적인 데이트를 대신할 수 있
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부모와 교회에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구혼기간(courtship)이
란 '구식' 풍습을 부활시키고 있다. 여기에서는 멘토링,
가족의 개입, 인격 수양 활동이 강조된다. 통계에 의하
면 대학 캠퍼스 내의 데이트가 감소 추세에 있다고 한
다. 많은 대학의 여학생들은 '파트너 없는' 여행을 선호
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로 고무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
으며, 이것을 계기로 부모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감정은 영구적인 관계를 세우기에 충분하지 않다젊은 남녀는 올바른 배우자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경우, 결정적인 요소는 언제나 성령 안에
서 마음과 영혼의 일치와 연합이어야 한다. 두 사람 모
두 그들의 관계가 자신들을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
도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분의 뜻만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려는 두 사람을 함께 묶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예수님이 없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두 사람 사이에
주시는 특별한 연합이 없다면, 부부는 모든 결혼이 반드
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갈등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할 것
이다. 특별히 그들이 일단 자녀를 갖게 되면 이런 상황
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남녀가 좀더 헌신된 관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확
신이 들면 자신들의 사랑이 지푸라기처럼 금세 타 없어
질 로맨스인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갖고 둘
의 사랑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육체적
인 매력이나 감정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런 현
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세울만
한 충분한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며 헌신을 하기 위한 결
정적인 요소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이런 기반들 위에 세
워진 관계는 얄팍하며 결국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우리
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 삶과 미래에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진정으로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확실
한 근거이다.
사람들은 대개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진심으로 그 말을 믿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사실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
든 육체적인 외모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
지 않은가? 우리가 만일 "그 여자 아주 매력적이야," 혹
은 "그 남자 아주 잘 생겼어" 라고 말하는 것을 정상적
이라고 여기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면, 그런 표현에 해
당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미묘한 메시지에 대해
서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문제는 결혼을 생각하는 젊
은 커플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젊은 여성은 주위에서 가
장 잘생긴 남자를 고르고 싶을 것이다. 젊은 남성은 모
임 속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차지하고 싶을 것이다. 그
러나 이 삼십 년 후에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남편
의 머리는 벗겨지고 아내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몸은 불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까? 육체적인 매력은 분명히 모든 관계의 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충성과 사랑에 대한 평생 헌신의 근거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이사야가 지적하듯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
르고 꽃은 시듦은……" (사 40:6-7).
특별히 우리가 젊을 때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눈
을 우리에게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지혜에 열어 놓는다면,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대
로 창조된 동료 인간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나는 로즈(Rose)를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왔
다. 성인이 되었을 때 로즈는 톰(Tom)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톰은 뇌성마비로 인한 심한 장애로 인해 평생을
휠체어 위에서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했고, 지금은 귀여운 두 아이까지 낳았다. 로즈에게
있어 톰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이다. 다른 사람들
은 단지 그의 장애를 봤지만, 로즈는 그의 아름다운 영
혼을 본 것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우리 공동체 일원이 된 빅토르
(Victor)와 힐다(Hilda) 부부는 구십 세까지 함께 살았
다. 스무 살 동갑내기로 결혼한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힐다는 아름다
운 여성은 아니었다. 칠십 세가 되자 그녀의 허리는 심
하게 휘었고 신경 마비로 인해 안면 좌측은 일그러졌
다. 그렇지만 빅토르에게 있어 힐다는 언제나 '나의 공
주님'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외모보다 훨씬 깊은 무엇에
근거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많은 젊은 부부들을 상담해
오며 함께 기쁨과 갈등을 나눴다. 얼마 전에 케이트
(Kate)라는 자매가 편지를 보내 왔는데, 그 편지에서
한 형제와의 관계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적고 있었
다. 케이트와 앤디(Andy) 두 사람은 아주 평범한 젊은
이들로 우리 공동체의 멤버이며 청년 그룹에 속해 있다.
그러나 관계가 계속 발전하면서 두 사람에게는 어떤 특
별한 선물이 주어졌고 그들이 함께 떠나는 순례자의 삶에 필요한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케이트는 이렇게 적
고 있다.
시작부터 이것은 내적으로 강하게 경험되었
습니다. 우리는 특히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의 대화는
인간적인 매력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효과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저희가
내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함께 경험했던 것들을
훼손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저희는 서로의 마음을 훨씬 더
깊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날마다 겪는 갈등과 실패를 알게 되면
서, 저희는 서로에게 권면과 격려를 줄 수 있었습
니다. 결과적으로 저희 둘 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
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완전한 관계가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없고, 날마다 조금씩 벽돌을 쌓
아 올리듯 꾸준한 믿음을 가지고 세워가야 한다
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저는 앤디와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기회들을 통해 저희는 진정
으로 확고한 기반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어려움 없이는 가치 있는 것
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앤디와 케이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격려를 준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관계를 서로 신중하게
다루기만 한다면 세상 무엇보다 귀중한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실례 속
에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예수님의 말
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앙만이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위한 확고한 토대라
고 믿는다면,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헌신하기에 앞서
반드시 그리스도와 교회 앞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 순리
이다. 이런 이유에서 세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죄를 회개하는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양심의 언약으로서 세례는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위한 안전한 토대가 있을 수 없다
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어느 누구도 남편, 아내, 자녀 때문에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눅 1 4:26 ). 또한 결혼 가능성이 있는
상대 때문에 세례를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 세례는 반드시 깊은 회개와 회심과 신앙을
보증하는 것이어야 한다.건강한 관계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마 6 :24). 우리가 하나님만을 완전히 신뢰
할 때, 하나님은 배우자를 향한 필요를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그
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
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33). 이 충고는 결혼의 문제
에 대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몰두한 사람들에게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나는 절대로 모든 젊은이가 바울처럼 결혼을 포기해
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신의 부르심은 내면에서
느껴져야만 한다. 그러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면 (하나님의 뜻은 종종 구분하기 힘들다) 우리 모두는
기꺼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빌 3:8). 예수님
의 빛이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 때 우리는 그 분께 철저
히 복종할 힘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참된
위치를 찾을 것이다.
남들이 모를수록 더 건강한 관계라는 통속적인 생각
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공동체는 약혼과 결혼이 당사자
들만이 아니라 온 교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매력
을 느끼면 먼저 부모님과 목회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들의 관계는 교회의 돌봄 아래 놓
이게 된다. 우리 공동체의 젊은이들은 이 과정을 일종의탄압으로 여기거나 감시로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
들의 미성숙과 순결하지 않음이 수많은 불행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공동체의 인도를 받을 수 있어
고마워한다.
이런 방식이 특별하게 헌신한 그룹 안에서나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누구나 결단만 하면 가능하다. 어
떤 젊은이들은 두 남녀 문제에 왜 다른 사람들의 지도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뢰하는 사람
들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래이(Ray)와 그의 약혼자 헬렌(Helen)은 우리 공
동체에서 서로 만났다. 다음은 레이의 이야기다.
토요일 밤이면 나는 친구들 몇 명과 어울려 놀
러 나가곤 했습니다. 산타 모니카의 3번 가를 향
하거나 방파제로 차를 몰고 돌아다니곤 했습니
다. 가는 곳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같이 갔던
여자 애들은 매주 바뀌었습니다. 심각한 일도 없
었고, 대단한 일도 없었습니다. 가끔은 특별하게
보이거나 좀더 알고 싶은 여자애도 있긴 했습니
다. 그럴 때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거나 식사나
영화 보러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
다. 전혀 해 될 것도 없는 관계였고, 그냥 애쓰지
않고 쉽게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헬렌을 알게 되기 3년 전까지 만해도 나는 그 일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브루더호프에서 성장한 우리 둘은 십대 무렵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둘 다 서로에 대해 어
떤 느낌을 갖고 있었지만 털어놓지는 않았습니
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
게 되었습니다. 그 애는 대학에 진학했고 후에 공
동체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소위 '세
상'을 향해 떠났습니다. 해외 자원봉사자로 6 개월
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서 몇 학기 대학을 다
녀 보았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을
1년간 떠돌아 다녔습니다. 결국 내 인생이 꼭 어
릿광대 같다는 씻을 수 없는 생각이 나를 구석으
로 내 몰았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부인
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
다. 나의 희희낙락하는 태도 뒤에서 가면을 쓰고
서 있는 진한 공허감과 무기력을 나는 너무 오랫
동안 부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내 생활방식은 내 욕구를
온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의 접촉, 특별히 여성들과의 접촉은 천박하기 그
지없었고 심하게는 해를 끼치기까지 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
는 치유 능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의 힘만으로 이것을 발견할 수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했고, 곧 집으로 돌
아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
에 모시기 원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
님과 공동체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나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부모님과 목회자에게 헬렌에 대
한 느낌을 알렸습니다. 그분들은 상황이 하나님
의 때에 자연스럽게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만약 너희들의 관계가 하나
님의 뜻이라면, 이루어질 것이란다. 그리고 아무
도 그 길을 가로막을 수 없을 거야." 그분들은 헬
렌에게 다가가 대화해 보라고 격려해 주기도 했
습니다.
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얼마 후 우리는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그것을 감히 사랑
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새롭
고 너무도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 몇
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서 자라나
고 있는 깊은 연합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
께 있기도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
니다. 어떤 때는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습니
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주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
해보거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냥 조용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내가 다른 지역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로 이사를 하게 되
자 우리는 거의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우정이 깊어지면서 서로에게 더욱 많
은 것을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서둘러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결점들을
알게 되면서 놀란 적도 많았습니다. 서로에게 상
처를 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우리 안에서 모양
을 갖추어가고 있는 사랑을 배신할 수도 있는 상
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
신의 편협함 속에 몸을 숨기려 할 때마다 부모님
과 교회 지도자들은 그곳에서 줄곧 우리를 인도
해 주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일은
때때로 고통스럽고 심지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
다. 특별히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
다. 그리고 부모님이나 다른 교회 멤버들이 주었
던 충고가 우리에게 언제나 합당했던 것만도 아
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동안 믿어왔던 사람
들을 신뢰하는 것의 놀라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
자, 우리는 그런 환경적인 지원 속에서 우리의 관
계를 펼쳐 나갈 기회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습니다.
결혼식을 앞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가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헬렌과 나는 서로의 마음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
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의 관계가 섹스 주위를
맴돌다 유혹당하지 않고 이렇게 깊어질 수 있었
던 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우리는 잘 압니
다. 그리고 어떤 미래가 닥칠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안내자로 남아계실 것입니다.
래이와 헬렌의 이야기는 어떤 헌신을 하기 전 두 사
람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로를 내적으로 아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결혼을 생각하는 두 사람은
먼저 각자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발견하려
고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두 사람이 이런 목적에
부합하여 함께 할 수 있는 건전한 활동들은 아주 많다.
독서, 하이킹, 양가 가족 방문, 공동체 봉사 활동에 함께
참가하기 등. 편지 쓰기 또한 좀더 깊은 수준에서 서로
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로맨틱한 사랑을 감정적
으로 호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장래 두 사람간
의 헌신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분별
력을 흐리게 할 뿐이다.
우리 공동체는 예비부부들에게 둘 간의 편지를 부모
님이나 목회자와 나누고 그들의 지도를 구하라고 격려
한다. 이 말은 우리 목회자들이 그 관계나 결과를 통제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보나 지원 그리고 영적
인 안내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만일 세상 모든 예비부부들이 겸손하게 부모나 신뢰하는 다른 부부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수많은 결혼이 파국으로 끝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건강한 관계는 급조될 수 없다. 그것
은 억지로 바란다고 미리 개화될 수 없는 꽃처럼 하나님
의 때에 피어나야 한다. 결혼이 지속되기 위해선 반드시
신중하게 만들어진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정직은 모든 참된 관계에 필수적이다. 만일 결혼을
생각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워진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 솔
직하게 말해야 한다. 여기서 교회는 두 사람이 정직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서로에게 정말로 의미
있는 존재인지를 분별하도록 그리고 그들의 우정이 좋
은 열매는 맺고 있는지를 숙고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계를 끝내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나 아무런 열매 없이 언제까지고
고통스런 관계를 지속시키느니 힘들더라도 관계를 끝내
는 것이 훨씬 낫다.
오직 두 젊은이가 각자 독립적으로 그러나 부모님들
과 목회자의 개입 하에 진정으로 평생 서로에게 속할 것을 확신할 때 그들은 약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오직 두
사람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느낄 때, 그리고 그들을 함께 인도해 오신 분이 하나님
한 분임을 느낄 때, 그들은 참으로 일생의 결합을 할 준
비가 된 것이다.
일단 약혼을 하면, 대부분의 예비부부들은 자유롭게
사랑의 행위를 하거나 구체적으로 사랑을 주고받고 싶
어 한다. 그들의 마음은 가능한 서로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만 있다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약혼한 모든 예비부부
들은 이 힘이 자신들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
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절제할 힘을 달라
고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긴 포옹, 애무, 키스, 그 밖에 성적인 충동을 일으키
는 모든 행동은 삼가 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육체적
인 접촉을 향한 욕구는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에 휘말리는 대신 예비부부는 내적으로 서로 더욱
친밀해지는데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서로의
사랑을 양육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고 있을 때 저지르는 성적
인 행위는 관계가 튼튼한 기초 위에서 발전하는 것을 방
해한다. 섹스는 무대 위에 등장하자마자 모든 관심을 독
차지해 버린다. 성적인 흥분은 그것의 본성상 진행적이
다. 일단 시작하게 되면 적당한 선에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자극하고 전희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들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 관계를 위해 스스로
준비시키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 끝까지 갈 것이냐, 아
니면 중지하고 불만족에서 오는 좌절을 경험할 것이냐
의 두 가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두 사람 안에 불붙은
욕구들은 죄를 짓지 않고는 진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간에 그만둔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행위는 영구적인
친밀한 관계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해롭다.
고백하지 않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가진 채 시
작된 결혼은 견고한 기반이 상실된 결혼이다. 이런 결
혼은 오직 고백과 회개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건강
한 결혼의 토양에 달려 있다. 만일 그것이 순결과 믿음
의 땅에 뿌려졌다면 좋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적어 놓은 문자가 아니라 그 정신을 붙잡으려
고 노력하라. 서로의 가장 깊숙한 마음을 탐구하라. 그
리고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모든
질문에 대한 그분의 답을 찾아라. 그분은 결코 실패함
없이 여러분을 분명히 인도해 주실 것이다.제14장
봉사하는 독신의 삶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 같이 할
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
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
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
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
어다."
마태복음 1 9:10-12
연합의 선물은, 사람과의 연합이든 하나님과의 연
합이든 결코 결혼에 달려 있지 않다. 사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결혼을 포기함으로 그리
스도께 대한 더 깊은 헌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친
다. 결혼이란 선물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
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엄청난 약속을 하시며,
재림하실 때 특별히 그들과 가까이 계실 거라고 말씀하
신다(계 1 4:1-5). 스스로 포기했거나 아니면 상대를
만날 기회가 없었거나, 어떤 이유에서 생의 반려자를 발
견하지 못했건 간에,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독신을
수용할 수 있다면 그들은 결혼 보다 훨씬 큰 부르심을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온전한
봉사에 특별한 방법으로 삶을 바칠 수 있다.
충만한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길 원하는 사람은 모두 그분에 의해
완전히 변화되어야만 한다. 이 도전은 그 이유가 어떻든
아직 미혼인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위해 독신의 삶을 선
택한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가장 충만한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요
10:10).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우리의 가장 깊은 부르심이다. 우리가 신랑 되신 그
리스도를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참되게 사랑한다면, 우
리가 세례식에서 물에 잠기듯이 그분 안에 깊이 잠기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그분을 향
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형제자매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이끌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그의 친구 클레어 간의 우정에
얽힌 이야기는 남녀관계가 꼭 결혼까지 가지는 않더라
도 한 형제와 자매로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프란시스는 모든 형제와 친구들에게 버림
을 받았을 때 클레어에게 갔다. 프란시스에게 클레어는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프란시스가 죽은 후에
도, 클레어는 그에게 충실했고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사
16 0
역을 계속 이어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결혼과는 무관
하면서도 여전히 참으로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다. 이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순결과 일치가 가져온 우정이
었다.
클레어와 프란시스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사
람이 보여준 특별한 관계가 모든 독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순결을 위한 싸움에서 독신자들
이라고 기혼자들과 크게 다른 게 없다. 독신은 순결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가 아니다. 순결을 위해선 끊임없
이 깨어 조심해야 하며, 육에 대항해 날마다 싸워야 하
고, 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허락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모든 빈자리를 채워주실 수 있다.
성경은 유혹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혹이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
신한다(고전 1 0:13). 만일 우리가 인내와 신실함에 있
어서 온전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이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순결을 지킬 수 있다
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과 형제자매들의 도움이 있
을 때 우리는 자유와 승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갈
6:1-2).결혼할 상대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
을 위하여 독신으로 남으라는 특별한 부르심도 받지 않
은 사람들은 비통한 마음이 들 위험이 있다. 결혼에 대
한 깊은 열망이 오랜 세월동안 충족되지 않은 상태로 남
아 있으면 마음이 굳어질 수 있다. 그럴 땐 하나님의 은
혜만이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고 결혼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결혼을 포기하고 여전히 평화를 발견할 수 있
는 것이다.
30대 후반의 미혼으로 우리 공동체의 멤버인 신디아
(Cynthia)는 자신이 어떻게 공허한 삶에서 벗어나 영
원한 만족을 발견했는지 비결을 말해준다.
'내가 평생 독신으로 산다?' 우리들 중 상당수
는 이런 현실을 직면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이유
는 우리가 우리 삶을 먼저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하
나님을 섬길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는 필요합
니다. 이런 삶이 불완전하고 덜 성숙되고 삶에 완
전히 뛰어들지 못하고 움츠러든 상태를 의미할까
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
입니다. 사실, 헌신적인 봉사의 삶은 하나님의 손
에 온전히 쓰임 받기 위해 결혼을 희생하거나 포
기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작가인 에이미 카미첼(Amy Carmichael)과
같은 독신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
께서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봉사를 원하시는지
알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인도에 갔습
니다. 그리고 힌두교 사원 사제들의 억압 속에서
거의 노예처럼 혹사당하다가 구출된 어린이들이
수용된 고아원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캘커타 빈민을 돌보기
위한 자매 수도회를 설립했고, 그 수도회는 전 세
계에 퍼졌습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독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독신생활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하여 선교사나 수녀나 사도가 될 필요는 없습
니다. 저는 결혼하지 못한 일 때문에 원망과 좌절
을 경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신 저는 날
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많
은 기회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거의 매주 지역 교도소에 수용된 수감자
들을 방문합니다. 지난 방문에서는 교도소에 수
감된 여성들이 성경 공부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
래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일상생활에서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
인지를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뒤 모두 한 목
소리로 '귀하신 주여'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같
16 3
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제가 매일 저녁 이처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은 모든 독신자들의 삶에 실제
적인 부분일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유혹과 마찬
가지로, 우리를 자기 연민에 빠지도록 그래서 혼
란에 빠지도록 유혹할 수 있습니다. 엘리자벳 엘
리엇(Elisabeth Elliot)은 '열정과 순결(Passsion
and Purity)'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당신
의 외로움을 수용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하
나님께로 인도하는 여정에서 여러분이 밟게 될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어린 소
년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
께 드린 것처럼, 여러분의 외로움을 하나님께 올
려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바꿔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하십시오!"
이 말에 실마리가 숨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들을 섬기십시오.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을 가르
치고, 간호하고, 상담하고 방문하십시오. 이와 같
은 활동이 여러분을 충만한 삶으로 인도할 것입
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
리와 같은 독신들은 그들을 위해 그곳에 있어 줄
독특한 임무를 자유롭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6 4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때때로 이 작업은 한 사람에게 아주 엄청난 중압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독신자들이 자신의 희망과 꿈들을 완전
히 포기할 수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짓누르는 공허
감을 없애주실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버리신 예
수님을 기억하며, 그를 위한 희생으로 독신의 삶을 지키
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계속해서 결혼을 갈망하는 사
람들은 결코 이런 기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
마도 하나님은 그들을 독신으로 부르지 않으셨을 것이
다. 결혼은 놀라운 선물이다. 그러나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더 놀라운 선물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기꺼이 하나님
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든지
우리가 처한 곳에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빌 4:11 -
13).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절대
로 해선 안 된다. 그러한 생각은 악마가 심어준 것이다.
헌신 유무와 상관없이 독신자들이 순간순간, 날마다,
주마다 슬픔과 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결혼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상실감과
번민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회 안에 다른 형제자
매들을 바라보게 하는 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본훼
퍼는 이렇게 말한다.
16 5
고통은 영원히 감춰질 수 있는 보물들을 우리
에게 보여주는 거룩한 천사입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들 보다 그 고통의 천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더 위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나
는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거듭거듭 그
렇게 말합니다. 종종 육체로까지 전해지는 아픔
과 갈망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은 언제나 극복되어야 합
니다. 고통이란 천사보다 더 거룩한 천사가 있습
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란 천사입
니다.24
독신을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더 높은 부르심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독신자들은 속상한 마음에 삶과 사랑에서 도피하려
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
의 장점을 질식시키거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희망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아도취적인 환상에 빠
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다른 귀한 것들이 펼쳐지
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 만일 독신의 삶을 선물 혹은
특별한 부르심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모든 에너지와 사랑을 남김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갈망은 자신들 안에서 흘러나와 그리스도와 교
회를 향하는 사랑의 물결 속에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충족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
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
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
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
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
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
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
전 7:32-35)
같은 편지 앞부분에서 바울은 독신의 다른 축복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특별히 어려운 때에 배우자와 자녀
에 대해 근심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
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
라" (고전 7:28).
과부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6 7
기혼자들이 할 수 없을 때 교회와 궁핍한 자들을 섬길
수 있다. 바울은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하거니와"(딤전
5:5) 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 교회 안에서
과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임명되거나 다
른 책임들을 위임 받았다. "가장 작은 교회 공동체 안에
서조차 감독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리
고 한 명의 과부라도 소외되고 병들거나 궁핍한 사람이
있는지 밤낮으로 살펴볼 책임을 맡았다."25
오늘날 과부들과 미혼 남녀들이 자주 무시당하고 외
로움을 느끼는 현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항상 그런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워줄 준비가 되어 있
어야 한다(고전 12 :26 ). 특별히 가족이 붕괴되었을 때,
우리는 혼자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보
여 줄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원
래 가족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우리 가족의 삶으로
그들을 초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이 말은 그들이 배우자를 만나도록 압력을 행사하거나
그들이 원치도 않는 동정심을 베푼다는 뜻이 아니다. 그
런 행위는 다만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말
은 교회 안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재능과 봉사를 환영하
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임무를 부여하고, 그래서 그들
을 교회 내부의 삶으로 끌어 들여 만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16 8
어떤 상황에 처해있건,
우리 모두는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중에 결혼한 사람은 우리의 행복이 다른 이들
과 나눠야 할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외로움으
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칠 수 있어야 한다. 기
혼자이든 미혼자이든 우리는 공동체 정신으로 서로를
섬기는 행위 안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안락한 결혼생활에 빠
져 사랑을 움켜쥐거나 자기 연민에 고립되어 사랑을 탐
닉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기 위해 부
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된 사랑의
가장 완벽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
들 대다수는 예수님의 손길을 느껴 보았거나 그의 부르
심을 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그분을 개인적
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한다. 우리
의 눈을 그분 한 분께 고정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는 피곤하거나 상심치 않고 그분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히 12 :2-3).
인생은 짧다.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현재 속에 있는
세상은 지나가 버릴 것이다(고전 7:29-31). 우리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는
16 9
안내자로서 뿐 아니라 우리 눈앞의 형상으로서 우리에
게 필요하다. 그는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살아있는 힘
이 되어야 한다. 그는 말씀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눅 12 :49).
그리스도가 과거에 계셨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심
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우
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구해야 한다. 우리
는 그가 오늘도 그리고 매일 우리 가운데서 드러나시길
간구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는 그가 부드러움과 온유
함과 겸손으로 그리고 진리와 명확함과 예리함으로 하
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를 증거 할 용기를 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중에 어떤 것도 빼거나 더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한결같은 마음(single heartedness)
의 핵심이며 독신으로 봉사하는 삶을 통해 드러
난다.3부
우리 시대의 정신제15장
하나님과 함께
아니면 하나님 없이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
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
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에베소서 5:1-6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일치를 결혼의 결합
과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만큼 가장 귀히 여겨지고
축하 받아야 할 결혼이 현대 문화 속에서 공격받고 모욕
당하고 있으며, 음란하고 불경스러운 영들에 의해 파괴
되고 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은 일종의 망상이다.
사랑의 거룩함이 더럽혀지고 짓밟힌 것은 우리시대
가장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이다. 점차적으로 사랑은 이
기적인 욕망정도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삶의 충족감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성
적인 자유를 논하지만 사실 성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고, 참된 사랑을 논하지만 자아도취적인 소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시대는 사랑 없는 시대이다. 관계
가 도처에서 깨어지고 있고, 수백만의 생명은 시작되기
도 전에 버림받고 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어린이들은
학대받거나 유기되고, 건강한 결혼이라고 여겨지는 곳
안에서 조차 공포와 불신이 넘쳐난다. 사랑은 조악한 섹
스로 실추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
은 일종의 망상으로 끝없는 공허감과 번민으로 점철된
잠깐의 친밀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날 세상의 너무 많은 것들이
영구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빼
앗아 가고 있다. 사랑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많은 일들
이 흥분과 욕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섹스에 사
로잡히고 섹스에 미친 사회 속에 살고 있으며, 광고, 문
학, 패션, 오락 등 영향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결혼은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결혼의 중요성은 너무나 왜곡
되어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물론,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대중
매체나 사회 안의 어떤 막연한 세력에 전가하지 않을 것
이다. 분명히 대중 매체는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
렸고 완고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영혼이 탐욕의 죄
로 짓눌리고, 결혼이 붕괴되고, 자녀들이 길을 잃어버리
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이 저
지른 짓을 가볍게 눈감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순결하지
못한 정신을 수용했고 그래서 우리 마음에 악이 들어오
도록 허용했던 모든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책임
을 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조롱하고 뒤틀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창조자와 분리시켜 놓았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들리는 외
침을 다시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
성혁명이 시작된 이후 30년이 흘렀다. 그것의 파괴
적인 결과는 모든 사람의 눈에 명백하다. 무분별한 성행
위, 십대 임신, 자살의 증가, 수십만 건의 낙태, 성행위
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의 확산, 가족과 가정생활의 침
식, 폭력적인 새로운 세대의 출현……. "저희는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다" (호 8:7).
우리 시대는 섹스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서점, 편의점, 슈퍼마켓 계산대를 막론하고, 섹스
의 중요성은 너무도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과장되고
있다. 남녀 사이의 사랑은 더 이상 신성하거나 고귀하지
않다. 그것은 충족시켜야만 하고 통제할 수 없는 충동처럼 단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여겨지며 일개 상품으로 전
락해 버렸다.
성혁명의 도구역할을 했던 현대의 성교육이 다른 어
떤 것보다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들은 성
교육이 자유와 개화된 태도와 책임과 안전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실패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고 있다. 지식은 아무런 안전장치가 되지 못
했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시행된 성교육은 단지 성적인
행위를 증가시켜 놓지 않았던가?
성생활에 대한 참된 교육은
경외감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성교육 수업에
서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지
금까지 시행된 성교육은 절대로 생물학적인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니었다. 많은 커리큘럼에서 학생
들은 자위를 포함해서 '안전한' 섹스에 관한 다양한 성
적인 활동들을 시각자료를 통해 (때때로 동영상으로)
배운다. 그 밖에, 성도착 행위들을 공개적으로 상세하게
토론하고 그것들을 성적인 '만족'을 발견하는 정상적인
방법들로 소개 받는다. 어떤 지역 학교는 동성애적인 생
활 방식을 이성애적인 결혼에 대한 대안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동성애적인 생활 방식을 인정하고 이해하라고학생들을 독려한다. 또 어떤 학교는 심지어 남녀 학생을
짝지어 전희와 오르가즘과 같은 주제들을 토론하게 만
든다. 그리고 피임이나 안전한 섹스 행위가 실패했을 경
우를 대비해 약물 요법이나 낙태를 긍정적인 안전장치
로 소개한다. 금욕은 아예 제외시키거나 아니면 단지 언
급하고 지나가는 정도이다. 전 교육부 장관인 윌리암 버
넷(William Bennett)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는 추잡함, 무정함, 냉소주의, 진
부한 말, 무례한 언동이 팽배합니다. 하나의 문명
이 부패되었다는 너무도 많은 표시들이 눈에 띕
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우리 자녀들 안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젊
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과 순순함을 빼앗는 일에
거의 광분한 것처럼 보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
습니다.26
지금까지 성교육은 '안전한' 섹스를 위한 준비훈련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성에 대한 십대들의
불장난을 막기 위한 시도로써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그
불장난에 부채질을 해 오고 있다.**미주27 대부분의 사
람들은 십대들이 자신을 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또 표
현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 시대는 수백만 건의 낙태, 공공 기관에 위탁된 수많은 미혼모, 성
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으로 만연하다. 정확한 지식
이 책임 있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
과하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성교육이란 이름 하에 가르쳐지
는 내용들은 대부분 전율할 만한 것들이며, 그리스도인
으로서 우리는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 그런 교육의 대부
분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항하라는, 즉 경외심과 순결에
반기를 들라고 가르치는 공식적인 훈련에 불과하다.
성생활에 대한 참된 교육은 경외심과 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하다. 출처도 모르는 이미지와 비인격적인 정보를 가지
고 섹스에 대하여 교육하는 것은 어린이에게 미숙한 성
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헌
신을 섹스와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자녀들이 특별히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자녀들과 성적인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에서 먼저 또래들에게서
그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섹스에 대한 너
무나 많은 생물학적인 사실들을 어린이에게 공개하는
것도 위험하다. 섹스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은 그것의 거
룩한 신비를 도적질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성교육이란 첫째, 자녀들의
성적인 양심을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느끼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둘째, 이기적인 쾌락은 다른 사람에
게 '상처'를 입히건 안 입히건 간에 사랑의 반대라는 것
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갈 5:13). 셋째, 하나님과
분리된 성 관계 혹은 모든 성적인 행위는 양심을 더럽히
고 정직한 관계들을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
이다. 넷째, 사람들을 성적인 죄에 빠뜨리는 깊은 공허
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어린이는 단순히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더럽히는 어떠한 행위
도 죄라는 것을 배움으로써 자신의 몸에 대한 건강한 태
도를 습득할 수 있다. 내가 십대였을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자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순결한 삶을
지키기 위한 갈등에 대해 그리고 내가 장차 만나서 결혼
하게 될 한 여인을 위해 순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
요하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그때 나는 지울 수 없
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네가 지금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머
지 인생에서 더 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
금 순결을 포기해 버린다면 결혼을 한다해도 유혹을 이
기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질것이다."
자녀들을 순결하지 못한 삶에서 보호하기 위해선 집
안의 허드렛일, 운동, 다른 활동들을 통해 자제심을 기
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떤 과업을 수행하며 교육받
은 어린이나 그렇게 하는 것을 자세히 보며 자란 어린이
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자라온 어린이나 요구하는 대로 들어 준 어린이 보다 성적인 유혹을 훨씬 더 잘 이겨
낼 수 있다.
섹스의 오용은
우리를 참된 자아와 다른 사람에게서 단절시킨다.
젊은이들은 음란한 삶에 굴복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으로 허용하는 사단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자위행
위를 예로 들어 보자. 어린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성적인 욕구는 증가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종종 자위행
위를 통해 즉각적인 성적 만족을 얻고 싶은 강한 충동
을 느낀다. 오늘날 부모, 교육자, 목회자 사이에서 자위
행위가 건강하고 자연스런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의 한 형태로 본다. 그리고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지
않은 어린이들 사이에서조차 자위행위가 종종 성적인
행동으로 귀결됨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 부모들과 교육자들은 진리를 말하길 두려워
하는 것일까? 왜 우리 자녀들에게 문란한 성생활과 자
위행위의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는 것일까? 두 행위 모
두 영혼의 질병이 아닌가? 두 행위 모두 하나님의 형상
을 더럽히고 저버리는, 그리고 결혼의 결속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자위행위는 결코 참된 만족을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은 고독한 행동이다. 그것은 자기 자극, 자기만족, 자기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우리를 꿈의 세
상 속에 가두어 놓고 우리를 진정한 관계들로부터 단절
시킨다. 그것이 습관화되면(종종 그렇게 되는데), 고독
과 외로움은 악화되고 좌절감은 격렬해진다. 최악으로
는 일치와 사랑의 결속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간음에 견줄 수 있다. 나는 자위행위에 노예가 된 많은
젊은이들을 상담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습관에서 자
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수렁
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자위행위로 갈등하는 사람은 종종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그것에 관해 다른 사람과 대화하길 꺼린다. 그
렇지만 부끄러운 행위들은 비밀로 이뤄지기 때문에 오
직 빛으로 가지고 나올 때 극복될 수 있다. 마음의 가책
과 속마음을 멘토나 목회자와 나누는 것은 분명히 고통
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참된 자유를 얻는 유일
한 길이다.
사람들은 생의 종착역까지 자위행위로 갈등할 수도
있다. 나는 80세에 여전히 자위행위에서 자유를 찾지
못한 남자를 상담한 일이 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저주
를 끊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자위행
위에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기도를 통해 힘을 얻으라고
충고해 준다. 여러분은 의지력만으로 여러분의 중독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여러분
의 생각을 하나님께 향하고, 자신 내부의 영적인 본성을
느껴 보라. 그때조차 자위행위의 유혹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
는 어떤 일을 찾아보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하거
나 집안일을 해 보라. 종종 단순한 활동이 이런 강력한
유혹들을 극복하는 최고의 수단이 된다.
자위행위란 노예 상태는 빈번히 음란 잡지와 같은
다른 형태의 속박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음란 잡지에
중독 되었다고 인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
나 그 산업이 수백만 달러 규모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
하는 모습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얼마나 많이
퍼져있는가를 반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음란잡지는 '피해자가 없기 때문에'
범법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순
결하지 못한 삶을 조장하는 것은 혼자 성적으로 자극하
는 형태라 할지라도 범죄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
상 안에서 영혼의 전으로 창조된 인간의 육체를 격하시
키기 때문이다(고전 6 :19). 소위 말하는 음란잡지, 자
위행위, 하루 밤 즐기기, 매춘 사이의 경계선은 사실 있
지도 않은 허상이다. 이 모든 행위들은 헌신이란 '부담
감' 없이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수단들이
다. 이 행위들 모두는 섹스의 신비를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술로 축소시키는 부끄러운 짓들이다. 그런 행위
들에 빠진 사람들이 숨겨온 비밀은 언젠가 밝히 드러나
고 말 것이다(롬 1 3:12 -13).기도와 고백은 음란의 고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음란이나 다른 죄로부터 자유로
워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는 가난한 심령
으로 하나님을 계속 바라볼 때 찾아온다. 유혹에 대한
갈등은 모든 사람 속에 있으며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와 고백을 통해 죄는 극복될 수 있다.
우리가 순결을 위한 싸움에서 경계를 늦출 때마다,
우리가 열정과 탐욕이 우리를 이기도록 허락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위험 속으로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그
러면 우리는 우리가 들어오라고 허락했던 악한 영들을
몰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가져오기 위해
서는 그리스도의 간섭이 필요하게 된다. 그의 간섭이 없
다면 절망과 좌절은 깊어질 뿐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순결하지 못한 은밀한 삶에 의
해 초래된 자포자기는 자살로 끝맺는다. 이것은 하나님
께 대한 반항일 따름이며, "내 문제는 너무 커서 하나님
도 해결할 수 없어. 나는 희망이 없어." 라고 말하는 것
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연약함 보다 크다
는 것을 부정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망의 심
연 속에서 발견한다면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을 찾고 그
의 연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의 나락을
거닐 때에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했다 하더라
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희망과 용기를 주시기 원하신
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죄를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요11 :9).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간구할 만큼 겸손하
기만 하면 된다. 누군가 자살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사랑을 보이는 것
이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 각자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
님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우리 각자에게는 성취해야 할
목표가 있다고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죄로부터 돌이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
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이며 기쁨
이다. 만일 우리가 일평생 이 땅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대면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놀라운 과업, 즉 그의 사랑을
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과업의 위대함을 깨달
을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부르심은 없다.제16 장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
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
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
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
라. 에베소서 5:8-12
지난 1 995년 6 월, 영국 교회위원회는 영국 국교회
안에서 동거 생활자와 동성애자의 생활 방식에
대해 '죄'라는 표현을 삼가고 대신 '격려와 지지'를 할 것
과, 더 나아가서 그들을 영국 국교회 안으로 적극 받아
들이라고 각 교회에 권고했다. 그 위원회는 '동성애 관
계'와 이성간의 사랑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제
안하며, 사랑이 '다양한 관계들 안에서' 표현되도록 허
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미주28 사실 오늘의 세상
속에서 그런 진술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 교회로부터 그런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
과 다른 교회 교파에서도 유사한 이념을 주장한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죄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말해야만 한다.
최근 나는 지역 고등학교 운영위원회에서 봉사한 일
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동성애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얼마나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것이 공공 생활 거의 모든 측면에 얼마나 파고 들어와
있는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교육부 산하 건강안전 권고
위원회(Health and Safety Advisory Committee)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소외를 우려한 나머지 '가족'을 정
의 내리길 주저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위원회는 결
국 소위 말하는 가족의 개념을 현실과 절충시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가족이란 서로 헌신하고 있는 두 사
람이다.'
많은 정치가들과 목회자들은 득표수 감소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정의에 대항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언약이라고 정의하길 거부함으로써 가족제도 전
체를 의문에 붙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완
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 한
명의 이성 상대에게 평생을 헌신하는 것이 단지 많은 선
택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어떤 독자들은 나를 마치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사
람이나, '게이 타도'를 외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
르겠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날마다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
고 있다. 그리고 동성애가 다른 것보다 더 나쁜 죄라는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동성애를 깔보거나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에 비해 동성애자들을 더 거칠게 정죄
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로 쳐다보는 것은 죄다. 우리는 복
음서에서 아무리 끔찍한 성적인 범죄도 용서받고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읽는다(엡 2 :3-5). 그렇지만 또
한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속하기 원하셨음에
도 불구하고 죄는 분명히 미워하셨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죄다. 그것은 '자연에 거역하는', 곧 하나님
의 창조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숭배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다(롬 1 :26 ). 동성 사이
의 성적인 행위는 소돔과 고모라의 아주 끔찍한 죄악이
었다(창 1 9:1-20).
레위기 1 8:22 -23에서, 하나님은 동성간의 성행위
를 혐오하셨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
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그리고 레위기20:13에서는,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
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
은 우리는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근거로 그러한 금지나 경고를 약화시키려 든다.
그렇다면 근친상간, 간음, 수간(동물과 하는 섹스), 인
간제물도 동일하게 그 다음 구절들에서 정죄되고 있는
데 왜 동성애만 따로 떼어 내어 약화시키려 하는가? "남
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 0:15-16 )
신약성경 또한 동성애를 정죄한다. 로마서 1 :26 -
28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
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
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
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
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 :9-10에서 바울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
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단지 동성간의 강간, 난잡
한 성생활, 이성애자들의 색욕적이고 '변태적인' 동성애
적 행동들만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새롭게 해석한다. 다
시 말해, 성경은 동성애건 이성애건 범죄로 간주되는 행
위만을 정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이 동성
애적 범죄자들(남색하는 자)에 관해 말할 때 동성애 자
체를 죄로 정죄하는 것이 분명하다. '범죄로 간주되는'
동성애 행위만을 악하다고 한다면, 같은 본문에서 바울
이 언급했던, 간음, 우상 숭배와 같은 것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로마서에서 바울이 동성애를 '정욕(sinful desire)과
더러움(sexual impurity)'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그것
을 '욕되고(degrading) 부끄럽다(shameful)'고 말한
것보다 더 분명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상실(depravity)'한 마음대로 내버려 둔 것이라 말하
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지적이 어디 있을까? 동성애적 행동들은 언제나 뒤틀어져 있다. 그 행동들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항상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 행동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동성애자들 자신들이 원해서 선
택한 것도 아닌 삶의 방식이나 성향에 대해 그들에게 책
임을 묻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린
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죄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동
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성적인 성향에 대해 책임이 있는
지 없는지의 문제와 그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을 판단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행위를 설명해낸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29
성적인 유혹은
그 원인과 종류에 상관없이 이겨낼 수 있다.
동성애자가 느끼는 성적 충동은 매우 격렬할 수 있
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
에게는 하지 마라는 것을 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이 있
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감당해야
할 모든 갈등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은혜를 하나님이 주
실 것을 믿어야 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 :9-10).
동성애를 반대하면서 우리는 비록 성경이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행위에 빠진 사람들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건 인간의 기본권이 부정되는 것을 결코 묵인할 수 없
다. 우리는 성경이 동성애보다 교만, 탐욕, 노함, 자기
의를 훨씬 더 많이 언급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성애를 하나
의 '대안적인 생활 방식'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특별
히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단체들에게 동성애자들을 교인, 심지
어 목회자로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에 대하여 저항해
야 할 것이다(고전 5:11 ).
동성애적 성향과 실제적인 동성애 생활 방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성애적 성향은
심리적인 영향들과 사회적인 환경과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어 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동성애 생활 방식은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의 문화, 가족, 유전자가 죄를 선
택하거나 죄를 거부하는데 있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
든다는 주장은 자유 의지의 개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성적 경향으로서 동성애는 특별히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은 연민과 도움
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우리의 교제
권 안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인내와 사랑뿐 아니라 계속되는
성적인 범죄행위를 묵인하지 않는 단호함 또한 필요하
다. 무엇보다 우리는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담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원래 창조 계획을 상기시
켜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남자나 여자 어느 한쪽이
없이는 참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동성애 유혹으로 갈등하는 많은 사람들을 상담
해 왔다. 때때로 어떤 사람의 상황은 희망이 없어 보이
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무리 깊이 생활 방식
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등하는 동성애자가 유혹에 넘어가
든지 그렇지 않든지 한 가지 변치않는 사실은, 만일 그
가 온전하게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이킨다
면 도움을 받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 나눠져 있다면 유혹에 저항하
려는 노력이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락을 향해 흘긋 눈을 돌리는 것조차 그 사람
의 마음이 나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이
것을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구적인 자
유는 오직 단호한 결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동성애로 괴로워하는 사
람들의 엄청난 내적인 어려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비뚤어진 성적인 욕구는 사실상 참된 사랑
의 관계에 대한 깊은 갈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동성
애자들을 보면 과거에 동성에게서 무조건적이고 품어
주는 사랑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아버
지가 없는 가정의 공백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동성애적 느낌들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리고 경쟁과 지배욕
이 판을 치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쉽게 낙
오자라는 느낌을 받게 되고, 결국 동성애로 출구를 찾게
되기도 한다.
나는 2 0년 전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 하워드
(Howard)와 앤(Ann) 부부를 가까이 알고 지내왔다.
하지만 하워드가 겪고 있는 깊은 갈등을 이해하게 된 것
은 최근에 들어서였다. 어린시절, 일중독이던 아버지의
무관심과 삼촌의 학대 그리고 또래들의 놀림 가운데 하
워드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고 쓸모없다는 느낌을 키
워갔다. 하워드는 아버지와 다른 남자들과 또래 남자애
들에게 무척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십대 중
반쯤 될 무렵 동성애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비록 하워
드는 자신이 인생에서 선택한 일들에 대하여 가정교육
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가족의 보살핌
없이 성장한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모든 부모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하워드의 이야기는 경고 이상의 내용을 전해
준다. 그 이야기는 어두움을 이기는 예수님의 능력을,
다시 말해 회개의 중요성과 용서의 치유하는 힘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기쁨을 증거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
다.
열여섯 살 때, 나는 다른 사내아이들과 어울려빈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형
이 나와 어떤 '실험'을 하자고 제안해왔고 저는 받
아들였습니다. 그런 성 경험들은 나에게 흥분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심한 죄책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나는 내가 겪고 있었던 것을 아무
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불러 놓고 그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어 오셨을
때 나는 거짓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스물 살이 될 무렵, 나는 사실상 할 수 있는 모
든 동성애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에
게는 어떤 만족도 없었습니다. 다른 남자들과의
접촉은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사진을
보거나 환상 속에 빠지는 걸 좋아했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남자들에게 느끼는
매력에 저항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 때문에 심리치료를 받을
때조차 정신과의사에게 개인적인 것을 말하지 않
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누구에게
도 말할 기회가 없었어.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쨌든 내가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해."
그러다 나는 첫 성 관계를 갖게 된 여성과 결
혼을 했습니다. 앤은 나를 사랑했고 받아주었습
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2 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아내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가 기절할 정도로 놀란 것은 당연했습니다.아내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하질 못
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나를 내리 눌렀던 생각
과 욕망에 관해 말해주었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
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그 말
을 믿어주고 내가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뒤에도 나는 충동적으로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몇 차례 가졌지만 아내는
계속해서 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많은 동성애자들이 '커밍아
웃'(coming out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
개적으로 밝히는 것-역자 주)해서 자신의 생활
방식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밝히고 사회의 인정을
요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용
납도 받을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
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나는 마
음으로 그런 용납을 원치 않았습니다. 내가 원하
는 것은 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도움이었습니
다. 마침내 나는 신뢰하는 평신도 지도자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내가 전부터 알
고 가깝게 느껴온 한 작은 모임 앞에서 동성애를
거부하는 나의 입장을 선언하도록 격려해주었습
니다. 처음에 그들은 충격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들은 나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갈등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회복을 향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첫 걸음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내와 나는 브루더호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치유를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왔다는 느낌
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그
러나 간혹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해 질 때면, 나
는 여전히 음란한 생각과 시선에 굴복하곤 했습
니다. 수차례 그런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
는 옛날 생활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내 힘으로
는 그 문제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서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속였습니
다. 그리고 나의 건재함을 아내에게 확신시켰습
니다. 나는 예수님이 음란한 시선에 대해 하신 말
씀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졌고 마음은 점점 더 굳어졌습니다.
앤은 계속해서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렇
지만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더 침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음란
잡지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나
는 거짓말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 보려고 시도했
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용기를 내어 아내와 공동
체의 모든 형제자매 앞에서 죄를 인정하게 되었
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내
행동을 너그럽게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
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정죄당하고 있다는 느낌
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를 혐오할 거라고 생각했
던 사람들이 참된 형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굳은 마음은 녹기 시
작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아내와 나는 떨어져 지냈고, 그
러면서 나는 참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앤은 교회와 나에 대한 헌신을 성실
하게 지켰습니다. 아내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
니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역
경과 고난이 와도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서로에
대한 성실을 지키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그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함께 있도록 인
도해 주었습니다."
물론 앤이 옳았습니다. 내가 완전히 깨끗해지고, 전
보다 마음을 더 활짝 열고 과거로부터 스며든 태도나 모
든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의 절박함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내 문제
에 나의 이기심이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보았습니
다. 그리고 나를 묶고 있는 어둠의 속박이 조금씩 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회개가 깊어지면서 나의 마음은 더욱 가벼워
졌고 나의 생각은 더욱 자유로워졌습니다. 마침
내 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가까운 가족이 되
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일평생 따라다녔던 그 저
주는 깊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깨끗한 양심이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훌륭한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미래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직면할 수 있는 용기
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남은 생애 동안 유혹
을 받게 될 것을 압니다. 그러나 또한 언제나 피
할 길이 있을 줄도 압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뛰
어넘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리고 그것은 이 사실을 믿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갈
5:1).30 하워드와 앤의 이야기는 승리가 쉬운 일인 것처
럼 가장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물론 그런
가장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치유를 받았음에도 불구
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년 혹은 여생 동안 유혹으
로 인해 갈등한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을
결박하는 죄로부터 해방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지만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적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에게 치유와 회복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히
9:14).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드린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것이다.제17과
보이지 않는 전쟁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
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
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
는 내 하나님이 되었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
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
시편 22 :9-11
거의 70여 년 전, 브루더호프의 설립자인 에버하
르트 아놀드는 이른바 '현대적인' 가족계획 개념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
는 대로 많은 자녀들을 갖길 희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적인 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로서 대가족을 환영합니다." 31
지금처럼 피임이 보편화되고 매년 수백만의 태아들
이 광범위하게 살해당하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해 아놀드
는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어린이들과 가정생활에 대한
우리의 기쁨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선
물에 대한 감사는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
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생명이란 선물을 고려하지 않는 섹스는 잘못이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정면으
로 반대할 뿐 아니라 어린이 자체를 거부한다. 이러한
사망의 영은 살인과 자살, 강간의 증가에서부터 널리 확
산된 가정폭력, 낙태, 사형제도,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 도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고 있으며 사망의
길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미국에만 국한되
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구
실 아래 태아의 살해를 허용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성적인 '자유'는 엄청난 파괴의 씨를 뿌려 놓았다. 이것
은 만족과 쾌락의 이기적인 추구 위에 세워진 거짓 자유
이다. 이것은 징계와 책임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는 진정
한 자유를 무시한다. 스탠리 하우워즈(Stanley Hauerwas)
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전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심
각한 결핍을 반영한다. 우리는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것
이다."32
사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아의 생명을 가로
막거나 파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다. 한 때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위대한 축복으로 여겨
지던 어린이들이 이제는 부담으로 여겨진다. 아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제한하는 '짐'이요 '위협'으로 여겨진다.
참된 결혼 안에서 부부애와 새 생명은 서로 밀접하
게 연결되어 있다(말 2 :15).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될
때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부부 행위는
창조적인 사랑의 표현, 생명을 섬기는 언약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관점에서 섹스를 보는 부부들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경우, 피임약은 성관계를 결과
와 책임에서 분리된 가벼운 행위로 만들어버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피임을 통해 산아제한을
하려는 사고방식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오늘
날 너무도 많은 부부들이 대중적인 사고방식에 휩쓸려
자기절제와 신뢰를 내팽개치고 성적인 탐닉에 빠지거나
가족계획에 대한 요구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섹스 자체
를 위한 성 관계는 부부간일지라도 부부행위를 값싸게
만들 뿐 아니라,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필요한 자신을 내
어주는 사랑의 기반을 침식시킨다. 생명의 선물을 고려
하지 않고 성적인 즐거움 자체를 목적으로 성 관계에 참
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행위는 자녀가 들어오지 못
하도록 문을 닫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선물과 그 선물
을 주는 자 모두를 경멸하는 것이다(욥 1 :21 ).
일전에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피임을 통해 생명을 낳는 힘을 파괴하는 행위
는 남편과 아내 당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행위는 남편과 아내가 자기 자신에게
열중하는 것이며, 그들 안에 있는 사랑의 선물을
파괴합니다. 사랑함에 있어 남편과 아내는 자연
적 가족계획이 그렇듯이 반드시 상대에게 마음을
집중해야지, 피임에서 하듯이 자기 자신에게 열
중해선 안 됩니다.
피임은 몸과 몸이 하나 되는 두 사람의 충만함과 결
실을 훼손시킨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키우
려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적극 반대해야 한다.
피임을 반대한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는 것
이나 엄마의 건강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의 크기 그리고 출산간격은 엄청난 책
임이 수반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갖고 기도하며 숙고해야 할 일
이다. 자녀들 사이의 터울이 너무 가까운 것은 특별히
엄마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이 문제는 남편이 깊은
존경과 이해를 아내에게 보여주어야 할 영역이다.**미
주33 이것 역시 반드시 부부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자신들이 느끼
는 불확신과 두려움들을 그분 앞에 가져가야만 한다(마
7:7-8).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을 연다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시리라 확신한다.낙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피임을 통해 산아 제한을 하려는 사고방식은 많은
가정에서 새 생명이 환영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죽음의
정신이다. 오늘날 사회 도처에서 생명을 적대시하는 보
이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어린
영혼들이 모독을 당하고 있다. 설사 피임의 방해를 무사
히 통과한 생명들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낙태
로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는가!
우리 사회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낙태는 헤
롯 왕이 저지른 유아 대학살을 방불케 한다. 낙태는 살
인이다. 그것에는 예외가 없다. 만약 예외가 있다고 가
정한다면 복음서의 메시지는 일관성이 없어지고 무의미
해진다. 구약성경조차도 하나님께서 무고한 자의 피 흘
림을 증오하신다고 분명히 밝힌다(잠6:16 -17). 낙태
는 생명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태어나
지 않은 모든 아기들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
문이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삶에, 심지어
태중에서 형성되고 있는 중에도 능동적으로 임재하시는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창세기 4:1에서 하와는 가
인을 임신하고 출산한 후에,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내
가 남자아이를 얻었다" 라고 말한다. 하와는 '아담의 도
움으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라고 말한다.시편 1 39편을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
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
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
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
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
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
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
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3-16 ).
욥은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
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
냐?"(욥 31:5, 1 0:8-12 )라고 외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
자로 세웠노라." (렘 1 :5).
우리는 또한 신약성경에서 태아들을 출생 전에 하나
님이 부르신다는 말씀(갈 1 :15)과 그들의 독특한 재능
이 엄마의 뱃속에 있는 동안에 예언된다는 말씀을 읽는
다. 태아에 관한 가장 놀라운 말씀 가운데 하나는 누가복음에서 발견된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
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
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 :41-44 )
본문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
을 알아보고 엘리사벳의 태 중에서 뛰었다. 당시 요한은
예수님보다 한 두주 전에 수태된 상태였다. 태어나지 않
은 두 아이들 중 한 아이는 성령에 반응할 줄 알았고, 다
른 한 아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
었다(마 1 :20-21 ).
분명히 말하지만, 새로운 생명이 단지 육체적인 혹
은 생물학적인 과정을 통해 잉태한다는 발상은 완전히
거짓이다. 자궁에서 생명이 잉태하도록 하시는 분은 바
로 하나님이시다(시 71:6). 그러므로 낙태는 언제나 이
활동을 파괴한다.
이런 이유에서 초대 교회는 낙태를 유아 살해라고 부르며 반대했다. 새로운 기독교 개종자를 위해 마
련된 가장 오래된 교육서(AD 1 00)인 디다케(The
Didache)는 낙태 문제에 매우 단호했다. "너희는 낙태
로 생명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낙태에 참여
한 자들을 "태아와 함께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
한 자들" 미주 **미주34 이라고까지 말한다.
오늘날 교회의 순결함과 단호함은 어디 있는가? 소
위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조차 무고한 태아들에게 자행되
는 잔악한 죽음의 전쟁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
다. 그 잔혹한 공포와 야만적인 기술은 의학과 법이란
가면 속에 숨어 버리거나 상황 윤리에 의해 '정당화'되
고 있다.
생명을 살릴지 죽일지를 판단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낙태는 살인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는 것을 나는 안다. 사람들은 내가 현실을 모른다고 말
할 것이다. 어느 정도 낙태를 허용하는 신학자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낙태를 허용하지 않으신
다고 나는 믿는다. 그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살인하
지 말라'는 그분의 법은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변하더라
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수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신성하
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절대로 낙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삶의 질'에 관한 설
득력 있는 주장이나, 태아의 심한 기형이나 정신 지체도
낙태 이유가 될 수 없다. 어린 영혼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육체적인 장애와 정신적인 장애는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요 9:1-3).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를 만
들고, 듣지 못하는 자를 만드느냐? 누가 앞을 보는 자
나 앞을 보지 못하는 자를 만드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
냐?"(출 4:11 )
어떻게 우리가 누구는 살 수 있고 누구는 살 수 없다
고 감히 판단할 수 있는가? 독일 나치 정권의 범죄 - 당
시 독일에서는 '우수한' 게르만 아기들을 특별한 보육
시설에서 양육했고 결함이 있는 아기나 성인은 가스실
로 보냈다 - 는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디트리히 본
훼퍼는 이렇게 말했다. "살 가치가 있는 삶과 살 가치가
없는 삶 사이의 구별은 어떤 것이라도 조만 간에 삶 자
체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35.
임신한 엄마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조차 낙태는
절대로 해결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태아와 엄
마의 생명은 동일하게 신성하다. '선한 결과를 얻기 위
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인간의
손으로 주무르는 것이다(롬 3:5-8). 이와 같은 상황 속
에서 번민하는 부부는 교회의 장로에게 가야 한다.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
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
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
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
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
라 (약 5:13-15)
교회가 연합하여 기도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엄마와 태아의 생명 모두에게 이뤄질 수 있다고 믿을 때
놀라운 힘과 보호하심이 역사한다. 종말에 - 나는 이것
을 두려움에 떨며 말한다 - 모든 것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인 비난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
지도 않고 단지 낙태의 중단만을 요구해선 안 된다. 에
버하르트 아놀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도덕 철학자들은 결혼 전후의 순결을 역설합
니다. 그리고 성생활이 순결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높은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
를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주장이라도 위선적이며 부당합니다. 사람들이 하
나님의 나라를 믿지 않을 때 태어나는 생명을 파
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회적인
무질서와 부정이 지속되는 한, 우리 시대의 소위
말하는 고등 문화는 이런 대량 학살을 계속할 것
입니다.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이 지금과 같은 모
습으로 남아 있는 한 낙태는 폐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탐욕, 불공정 같은 사회적인 역기
능들과 싸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삶의 방식
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
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구체적인 방
법들을 통해 싸워야만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혼 안에서의 순결과 낙태의 종식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
에 의해 의도된 많은 자녀들로 축복 받은 가장 멋
진 가족의 모습을 희망할 수 없습니다.36
이 땅의 교회는 비참하게 실패했다. 너무도 많은 십
대 미혼모들이 낙태란 질문 앞에 날마다 서고 있다. 그
러나 그들은 아무런 내적인 안내나 감정적인 혹은 경제
적인 지원도 받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낙태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성폭력의희생자이거나 분노한 남자 친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거나 부모의 압력에 못 이겨 아기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낙태를 경험했던 일단의 여성들과의 대화를 통
해, 프리데리카 매튜스 그린(Frederica Mathewes
Green)은 여성들이 낙태를 선택했던 공통된 이유를 발
견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들은 관계들 때문에
낙태를 선택했다. 사실 여성들은 낙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원과 희망이었다고 프리데리카
는 말한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염려하는 사람들
을 기쁘게 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여성이 낙태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들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다른 사람, 즉 태어나
지 않은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발견합
니다. 그러므로 낙태에 뒤따르는 슬픔은 아기와
의 관계를 철저히 배신했다는 뉘우침에서 오는
것입니다.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한 여성들을 돕기 위해서
는 그동안 미혼모 시설에서 해왔듯이 주택, 치료,
의복, 상담 등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들의 변치 않는 친구가 되
어주는데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21 0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움입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37
낙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말할 때, 영혼에 이보다 더
큰 고통과 번민을 안겨주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낙태를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다른 실천 가능한 대안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
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성들 또한 거의 찾아보기 어렵
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엄청난 양심의 가책으로 고
통당한다. 이런 고립과 끝없는 고통은 오직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때만 치유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인으로서 수많은 여성들이 죽은 아이 때문에 가지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헤아려줄 필요가 있다. 우리 중에 누
가 먼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8:7) 낙태
한 여성들에게 냉소를 보낸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
이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태아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한 어머니의 자
궁을 통해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내셨다. 마더 테
레사가 지적한 것처럼, 엄마가 태아에게 등을 돌린다 해
도, 하나님은 그 아기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각
각의 아기를 그분의 손바닥 위에서 빚으셨고, 각각의 생명에 대하여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까지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
에게, 우리는 마더 테레사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제발 아기들을 죽이지 마세요. 저는 아기들을 원합
니다. 제발 그 아기들을 나에게 주세요."제18장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
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
음함이니라.
누가복음 16 : 1 8
이혼과 재혼에 관한 질문은 우리 시대 교회가 직면
한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사안일 것이다. "하나
님께서 묶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고 하신 말씀
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부부, 즉 결혼은 죽음이 그들
을 갈라놓을 때까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신실함
(마 1 9:6)이라고 믿는 부부를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들
어지고 있다.
결혼의 결속은 일시 중단될 수는 있어도
결코 파기될 수는 없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과 재혼이 도덕적
으로나 성경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21 3
이혼을 무척 싫어하시지만 인간의 타락한 상태 때문에
할 수 없이 허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완
악함 때문에 결혼이 파탄에 이르거나 파기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타락한 세상 속에서 이상(ideal)이 늘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
나님의 용서를 통해 누구나 다시 결혼만 하면 항상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약속으로 맺어진 결속은 무엇이란 말인
가?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그 약속을 부인할 수 있다
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부정(不貞)한 행위를 허
용하신다는 말인가? 교회의 연합이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결혼도 이런 연합을 반영해
야 하며 결코 파기될 수 없다. 나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
인들처럼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이혼 후에 재혼은 있
을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일치 안에서
두 사람을 묶으셨다는 것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두
사람을 함께 묶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부정한
행동을 했건 혹은 두 사람 다 했건 간에 이 사실은 변경
될 수 없다. 자신의 배우자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한 어
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자유는 없다. 그렇
지 않다면, 결혼의 결속은 늘 위태할 수밖에 없다.
모세가 율법 아래서 이혼을 허락한 것은 마음의 완
악함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셨다(마 1 9:8).
21 4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주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마음
의 완악함은 더 이상 타당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모세
는 "누구든지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이혼 증서를 주
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행한 경
우 외에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아내로 하여금 간
음하게 하는 것이다.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
음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마 5:31-32). 제자
들은 예수님의 이 단호한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했다.
"만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차라리 결
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마 1 9:10). 모세는 단
지 필요성에서 이혼을 허락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
이 애초부터 파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
은 절대 아니다. 결혼은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버리거
나, 아내가 간음한 남편을 버린다고 해서 파기될 수 없
다. 하나님의 명령은 쉽고 간단하게 철회될 수 없다.38
바울도 분명하게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한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
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
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
라.
(고전 7:10-11 )
21 5
바울은 또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은 남편에
게 매인 몸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다시 결혼해도 좋습니
다. 그러나 반드시 그리스도인과 결혼하십시오."(고전
7:39) 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러므
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인은 간음한 여자"(롬 7:3) 라고 말한다.
간음은 한 몸이 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신비로
운 결합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장 질 나쁜 속임
수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간음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
야만 한다. 그리고 간음한 자들은 징계를 받고 회개해야
만 한다(고전 5:1-5).
깨어진 결속에 대한 해답은 정절과 사랑이다.
예수님이 간통이나 간음의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하
셨다 하더라도, 이것이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핑계나 재
혼하기 위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화해와 용서를 이루신다.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은 언제
나 양심에 쓰라린 얼룩을 남기게 될 것이다. 부정한 배
우자 때문에 아무리 큰 고통을 겪었더라도, 상처받은 배
우자는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
할 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마 6 :14-
15). 배우자에 대한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신
실한 사랑만이 깨어진 결속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다.
지금은 콜로라도 주에 있는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고있는 켄트(Kent)와 에미(Amy)는 전에 한번 이혼을 경
험했었다. 이혼 당시 그들의 상황은 재결합을 하기에는
절망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 계속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서로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켄트
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결혼에 엄청난 문제들
이 생기기 시작했고, 3년 간 우리의 관계는 추락
을 거듭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았습니다. 나는 결혼이란 단지 아내와 함께 살
며 재미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결혼과 연관되어 있는
지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감정은 메말라
가기 시작했고 때때로 삶을 경멸하기조차 했습니
다. 나는 성경 읽기, 기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
기 등, 내가 해야 된다고 마음먹었던 모든 '영적
인 일'들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아내
와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없
었습니다.
고통은 너무도 컸기 때문에 우리는 별거를 결
정했고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내가 자란 교회의 가르침과 정반대였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늪에서 빠져 나
21 7
올 다른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
니다. 하지만 이혼을 결정한 후에도 고통은 여전
했습니다. 모든 정서는 고갈되어버렸고 아침이
면 웃옷의 단추를 끼울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이
런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던 나는 목사직을 내려
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에미 역시 완전
히 황폐해져 갔습니다. 나는 아내도 상황이 변화
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서로를 향해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고통을 해결해보려고 다시 일을 시작해 보았
습니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 자신을 다른
관계에 빠뜨리면 더 큰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을 알
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어
렴풋하게 과거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노력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
내에게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날마다
자신에게 맹세했습니다. 어떤 말을 해보려고 시
도할 때마다, 우리의 대화는 싸움으로 종결되기
일쑤였습니다.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조차 없는 상
황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의 초점이 흐려지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무 것도 소용이 없었습니
다. 내가 왜 열심히 일해야 한단 말인가? 누가 나
21 8
를 이렇게 바보로 만들었단 말인가? 하나님의 뜻
을 따라 본들 좋은 결과도 없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느 날 밤 직장을 나서다 밤하늘의 달
과 별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무언가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의 위엄과 자비를 새롭게 느꼈습니다. 순간 눈에
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나의 모든 고통과
절망 속에서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나의 참 어
려움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꺼번에 느
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내에게 했
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포기
하지 않으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밤은 진
정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안
의 무언가가 변화되는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나를 다시 만나게 해줄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길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노력을 통
해서 서로를 발견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재결합
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2 년의 시간이 걸
렸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대화와 수많은 용서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수
많은 고통과 감정을 느꼈고 그런 뒤에야 그것들
은 사라졌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조해 주신 분은
21 9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계속 그분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문
을 열어 놓도록 도와주신 분도 그분이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여전히 험한 돌길을 통과 중입
니다. 아마도 우리는 항상 그런 길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아주 다른 사람입
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연약함이나 아내의 연약
함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우리는 탈출구를 찾
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실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서로를 향한 우
리의 사랑을 보호해 줍니다. 내가 정신을 집중하
고 헌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바로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물론 모든 결혼의 갈등이 켄트나 에미의 경우처럼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우리 브루더호프 공동체들 안
에서도 배우자가 부정을 저지르고 공동체를 떠나 결국
배우자와 이혼 후 다른 사람과 재혼한 사례가 여럿 있
다. 거의 모든 경우, 뒤에 남겨진 배우자는 교회 안에 남
아 멤버의 맹세와 결혼의 맹세를 지키기로 결정한다. 이
것은 분명 고통스런 선택이다. 그리고 자녀가 개입되었
을 경우 그 고통은 의심할 것도 없이 더욱 크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것은 제자가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
의 일부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22 0
견디어 나갈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결혼하는 모든 부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남편은 잘못된 일에서 절대로 아내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그리고 아내는 잘못된 일에서 절
대로 남편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만일 둘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길에서 떠나려 한다면 그리
고 공동체로 살며 교회와 하나님께 봉사하는 삶
을 버리려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결혼보다 우리
주, 나사렛 예수에 대한 신앙과 그의 성령 안에서
의 연합을 항상 위에 두겠습니까? 그리고 정부의
권력과 상충될 때에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
지지 않은 결혼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지
식 안에서 이 질문을 당신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질문은 완고한 소리로 들릴지 모
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지혜가 숨어 있다. 어떤 의
미에서 이 질문은 제자가 되기로 공언한 우리 각 사람
앞에 놓인 선택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는가?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누구든지 내게로 오면서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혹은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 4:26 )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만일 어떤 부부가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로 인해 별거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
나 신성한 결혼의 결속은 사실상 보호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결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 안
에서 연합된 두 사람 사이의 연합이라고 하는 보다 깊은
결속에 관한 문제이다(고전 7:15-16 ).
배우자가 어떤 부정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 배우자
에게 정절을 지킬 때, 그것은 앞서 언급한 연합을 증거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교회 사이의 영원히 성실한
관계는 항상 새로운 헌신과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배우자의 성실이 믿지 않는 배우자
를 예수님과 교회와 결혼으로 다시 인도한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16 장에서 소개된 앤과 하워드의 경우는 그런 실례이
다. 하워드가 다시 죄에 빠졌을 때조차, 그리스도와 교
회에 대한 앤의 헌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하워드의
속임수를 거부하고 그를 따라가지 않았지만, 앤은 남편
을 정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남편이 회개하고 새 출발
을 하도록 조용히 이끌어주었다. 앤의 확고부동한 신념
의 결과로, 그들의 결혼과 하워드의 신앙은 모두 회복되
었던 것이다.참된 정절은 단순히 간음의 부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 없거나 죽은 결혼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각 사람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 중 한 번 혹
은 그 이상 냉담한 마음이나 사랑 없는 마음을 배우자에
게 갖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부부
들이 서로를 사랑하기보다 그저 함께 사는 정도에 머물
고 있는가? 참된 정절은 단순히 간음하지 않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반드시 마음과 영혼의 헌신이 있어야 한
다. 서로에 대한 헌신이 부족할 때마다 남편과 아내의
삶은 평행선을 그리거나 소원해지고 별거와 이혼은 모
퉁이에서 몸을 도사리게 된다.
간음의 영과 싸우는 것은 모든 교회의 임무이다. 이
부분에서 간음이란 단지 육체적인 행동만을 말하지 않
는다. 여기서 언급되는 간음이란 결혼 내부에서 사랑과
순결을 약화시키고 서로 경외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모
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간음의 영에 자양분을 공급하
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을 간음이라고 말하셨다(말 2 :10-16 ).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은 부부간의 정절을 하나님
의 신부이자(호 3:1)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설명하는데 사용한다. 비슷한 방법으
로 사도 바울은 결혼을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그
의 교회 사이의 연합과 비교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
22 3
경적인 이미지들 안에서만 이혼과 재혼에 대한 문제들
을 분명하게 해결할 수 있다.
교회가 그 구성원들의 결혼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면, 그들의 결혼이 깨어졌을 때 어떻게 순결을 요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
다"고 증언하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면서 어떻게 결혼한
구성원에서 헌신 된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함에 있어 반드시 두 가지 사실을 명
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절대로 이혼에 동의할 수 없
다. 둘째 그렇지만 위기에 처했거나 고통 속에 있는 사
람들을 절대로 율법주의나 고정관념으로 대하지 말아야
만 한다. 이혼을 거부한다고 해서 이혼한 사람이나 재혼
을 한 사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해서 아주 날
카롭게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연민의 마
음이 결코 부족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
은 모든 죄인을 구속하고 치유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모든 죄에 대하여 회개를 요구하신다. 이것은 또
한 모든 깨어진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
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무엇 보다 그리스
도께 온전히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진리 전체
를 온전히 끌어안아야 한다(마 2 3:23-24). 그러므로
브루더호프 공동체 안에서 세례 받은 멤버는 이혼을 할
수 없고, 전 배우자가 아직 생존에 있는 동안에는 재혼
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혼하고 재혼한 사
22 4
람도 재혼한 상태로는 정식 멤버가 될 수 없다. 재혼은
이혼의 죄를 더 심화시키고, 이전 배우자와 화해할 가능
성을 차단시켜 버린다. 우리는 결혼 안에서 평생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 외 다른 입장은 어
떤 것도 참된 사랑이나 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결혼 약속의 중요성은 재발견되어야 한다. 이제야
우리는 이혼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폐해를 직면하기 시
작했다. 어른들만 놓고 봐도 그렇지만, 어린이들에게 있
어 이혼은 그냥 '극복해'라는 말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다. 최근 연구들은 부모가 이혼한 대다수 자녀들이 불
안, 발달 지체, 자기 비하의 증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부
모의 결혼이 깨지고 1 0년이 지난 뒤에도, 그들은 여전
히 두려움, 우울증과 같은 감정적인 문제들 때문에 고통
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표출한다.
복합 가족(이혼, 재혼 등으로 비 혈연 가족이 포함된
새로운 가족, 역자 주)은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복합 가족이 본래 가족 구조를 회복할 수
는 없다. 사실 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이들은 홀
부모 가정에 있는 어린이들보다 더 불안정한 모습을 보
인다.39 오늘날 우리의 어린이 세대는 참된 역할 모델을
보여주는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어린이들이 단순히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알
지 못한다. 오늘날 선한 의도를 가진 젊은이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들이 혼기가 되어 가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 과연 어디에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22 5
하나님과 함께 라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
이혼을 피하려면 교회는 멤버들의 결혼이 붕괴하기
오래 전부터 멤버들을 안내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
해야만 한다(히 1 0:24,12 :15). 결혼이 위기에 처했다
는 아주 작은 징후만 보여도 그것을 정직하게 공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일단 부부가 너무 멀리 표류하
여 멀어지게 되면 서로의 마음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
는 시간적, 공간적 여백이 필요하다. 어느 한 쪽이 폭행
을 당해 온 상황이라면 한시적인 별거가 필요하다. 특별
히 이런 방법을 선택할 경우 교회는 반드시 양쪽 사람을
돕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먼저 회개
를 촉구해야 하며 그런 다음 결혼을 회복시키는데 필요
한 상호 신뢰와 용서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정절은 너무나 보기 드문 나머지 '영
웅적인'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
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신앙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
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갈 5:22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들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우리의 배우자를 굳게
붙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이런 결심을 할 때 우리
는 결혼의 맹세를 성실하게 지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제자의 길은 좁은 길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든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마 5:24).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렵다면,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더 이상 회개와
용서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
로 만드신 것을 그의 은혜로 함께 지켜 갈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하
나님과 함께 라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
복음의 요구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우리에게 능치
못할 일은 없다(마 11 :28-30). 만일 우리가 이 믿음
안에서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라본
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대한 약속이며 희망이
며 능력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가르침은 도덕
주의자와 철학자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가르
침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움이다. 그리고 그
것은 부활과 새 생명의 실재 위에 기초한다.
22 7
제19장
그러므로 자 다 함께 깨어있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
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
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
모하지 말라.
로마서 1 3:12 -14
우리 시대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과 문란함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결과 충실한 사랑이 여
전히 오늘날에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제도권 교회들은
결혼의 헌신 안에서만 성적인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하길 게을리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순결과 정절을 깊이 갈
망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갈망하는 것으
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직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성
령의 인도를 기꺼이 따르고 순종할 때, 우리는 날마다
의 삶 속에서 그것의 위대한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 우
리는 정말 성령의 능력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
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완전히 바꾸시도록 그래서 우
22 8
리의 삶을 뒤엎으시도록 기꺼이 허락하고 있는가?(롬
12 :2)
순결을 향한 싸움은 매일의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누구나 유혹을 알고 유혹에 빠져본 경험이
있다.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두 번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현실을 더 빨리 직면하
면 할수록 더 좋다. 비록 삶의 출렁거림으로 갈등하고
승리의 순간 뒤에는 의심이 뒤따라오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이다(히 4:15). 그분
의 도움으로 우리는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순
결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는, "시험을 받은 후, 더 강
건해졌다면 복 있는 자입니다" 라고 말한다(약 1 :2). 우
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의지가 있는가가 중요하
다. 그 의지는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갈 때마다 우
리 안에서 말할 것이다.
우리가 정절을 위해 몸부림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온 의지를 다해 순결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이
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약
1:6-7).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이룰
수는 없다. 우리 내면이 점점 광포해져 간다면 비록 안
간힘을 다해 수면 위에 계속 고개를 내밀지라도 곧 탈진
해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께 복종할
22 9
때 그의 은혜의 능력은 우리를 채울 것이며 새로운 힘과
결심을 주실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정신과 싸우는 일에 있어, 우리는 반드
시 간음, 속임수, 살인과 같은 명백한 죄 뿐만이 아니라
냉담,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성실과 사랑 그리고 정
의와 평화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뿐 아
니라 행동으로 이것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
리 시대의 정신은 우리를 치명적인 자기만족으로 둔감
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시대의
악에 반대한다고 삶과 행동을 통해 당당하게 말하지 않
는다면, 그것은 고의적인 범죄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우
리는 모두 변화되어야 하고, 그 변화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있는 무관심과 싸우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
반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전 섹스, 이
혼, 동성애 행위를 부도덕한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
에는 이것들이 수용 가능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그 입장에 동
조한다. 그리고 이제는 수간,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
가학 피학성 변태 성욕이 '성적인 표현'의 수단으로써
지지를 얻고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성전환은 생
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불경한 행위는 서구
세계 전역에서 추진력을 얻고 있다. 제3세계와 우리나
라 빈민가에 만연된 굶주림과 빈곤을 생각할 때, 이 수
술 하나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는 것은 인류에 대한범죄 행위이다.
이 모든 시대 풍조에 경악하는 부모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이런 타락의 참상을 자녀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비
록 예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만, 내 경험상 그런 행동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의 영혼에
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우리 시대의 뻔뻔함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도스토에프스키는 다
음과 같이 상기시켜 준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
는다면, 아마 모든 것이 허용 될거야." 우리는 지금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언제쯤 우리는 하던 일
을 멈추고 우리의 죄악 된 모습 뒤에 있는 끔찍한 반란
의 정신을 숙고하고 하나님이 종말에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란 경고를 기억할 것인가? "너희가 심은 대로 거둔
다." 라는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너무 늦기 전에 자비로
운 심판을 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이 우리
의 죽은 양심을 흔드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새 생명
을 주시도록 간구하자.
오늘날 우리는 세례 요한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절
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회개
와 회심과 신앙과 새로운 삶을 부르짖는 '광야에서 외
치는 자의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요한의 메시지는 간
단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 그
는 당시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와 대면해도 두
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부정한 결혼 행각을 버린 헤롯 왕을 대면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헤로디
아를 아내로 삼은 것은 잘못이오."(마 1 4:3-4). 아마
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례 요한이 소위 헌신되고 종교
적이고 '선하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을 책망한 일일 것이
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
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
고"(마 3:7-8).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에서는
선한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마 9:37). 이 말씀이 그
당시보다 오늘날 더 적용되지 않겠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
들이 그리스도의 자유를 갈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
은 죄의 사슬에 메어 있다. 용감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끝까
지 굽히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임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 우리는 진심
으로 선행 행동을 하기 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
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이 단지 인간
본성에 대항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어떤 세력 즉, 정사(powers)와 권세
(principalities)(엡 6 :12 ), 그리고 요한이 '끝이 보이지 않는구덩이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부르는 파괴적이고 악마적
인 영과 상대하고 있다(엡 6 :12 ).
이 짐승은 모든 국가와 모든 정부를 쥐고 흔들고 있으
며, 그 증거는 참된 우정과 공동체의 부재에서, 가난한 자들
에 대한 억압에서, 여성과 어린이 착취에서 그리고 대규모
태아 살해와 사형제도 등 우리 사회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
다. 무엇보다도, 절망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짐승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종말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요일 2 :28). 마지막 유혹의 때에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우
리는 반드시 계속 깨어 경계해야 한다. 아무도 우리가 하는
말을 기꺼이 들으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그
대의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일 내적인 힘과 용기를 간구해
야 한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와 도전
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편의 멸망할 세상과
다른 편의 구원 받을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열 사람 모두가 처녀였다. 그리고 열 사람
이 모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교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
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
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
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
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
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
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
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
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
느니라 (마 2 5:1-13)
우리는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는 도전해 오는 죄를 피해 달아나선 안 된다. 우
리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모든 것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항의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과 분열시키고 분리시키는 모든 것에 대항해 공개적
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의만으로는 충분하
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저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결혼을 반대하고, 모든 쾌락을 거부하는 것으로는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실재, 즉 이 세상의 정신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실재를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와 자매들이 공동의 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곳마다 순결과 평화와 일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영
적인 의미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
제적인 나눔의 공동체를 건설함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반드시 사랑의 힘을 증거해야 한다. 우
리 각 사람은 사랑의 섬김 안에서 우리의 삶을 다른 사
람에게 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일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요 1 3:34-35).
하나님의 뜻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교회는 먼저 시
대 풍조에 반하는 참다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구체적
인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것은 헌신된 노력을 요구한
다. 순결 프로그램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교회가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이루지 않는
다면 결혼과 가정은 계속해서 무너질 것이다. 그리스도
인 가정들은 목회자들과 함께 세상의 방식들과 반대되
는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삶을 살겠다고 서약할 필
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세상과 다른 수준에서 서로 관
계를 맺지 않는다면 항의는 고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진지하게 순결
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질 수 있도록 서로를 형제자매로서 붙들어 주어야 한다.
이 원리는 우리가 가정 안으로 허용하는 모든 것, 즉 우
리와 자녀들이 옷을 입고 사물을 보고, 이성과 관계 맺
는 것 같은 매일의 삶에 적용된다.
그러한 공동체의 가시적인 증거는 수백만 번의 금욕
캠페인 보다 더 큰 확신을 우리 사회에 줄 것이다. 이 세
상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생활-참된 자유와 책임이
함께 가는-이 가능하다는 살아 있는 증거를 볼 때에만
사람들은 그런 가치와 규범을 기꺼이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일관성 있게 삶으로 표현되
는 곳마다 세상의 오해와 반대가 일어날 것이다(벧전
4:4). 2 천년이 지난 오늘의 세계는 예수님 당시보다 그
분의 메시지에 더 관대하지 않다. 그분의 길을 좋아하
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
개하고 심지어 원수가 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충돌은 불가피하다(요 1 5:18-20). 그러나 그리
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우리가 핍박이 두려워서 그
분의 명령을 따르길 두려워한다면 누가 그렇게 할 것인
가? 세상의 어둠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져가는 것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면 그것은 누구의 임무란 말인가?
우리의 희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인 도래할 하나님
의 나라에 있다. 자! 우리 함께 그 날을 성실하게 기다
리자. 그런 기대와 기다림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모
든 행위에 영감을 주고 영향을 주어야 한다. 모든 관계
와 모든 결혼은 그 나라의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준비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신
부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가 오실 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까? 우리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을까?(엡 5:27) 아니면 변명만 늘어놓
을 것인가?(눅 1 4:15-24)
우리는 우리의 증거가 초래할 조롱과 비방을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는 것은 인간 사
회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 - 그의 나라의 놀
라운 미래- 가 되어야 한다. 역사의 마지막 시간을 그
의 손안에 붙들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
로 우리 삶의 매일 매일은 그 시간을 위한 준비가 되어
야 한다.학습교재학습교재 사용법
.......................................
이 학습교재는 책의 내용을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해 만들
어졌다. 이 교재의 구성은 개인 연구와 그룹 토론 모
두에 사용될 수 있도록 짜여졌다. 질문은 해당 본문을 먼저 읽
은 뒤 답하도록 하라.
각 과는 기본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준비하기'는
해당 과의 주제에 접근하도록 돕는다. '심화하기'는 저자가 말
하는 의미와 적용을 탐구하는 질문이다. '도전하기'는 여러분
이 개인적으로나 그룹에서 함께 읽은 것을 매일의 삶에서 실
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도록 도전한다. 각과의 질문들
은 여러분에게 순결을 고취시키려고 의도되었다. 그러므로 질
문에 대한 기계적인 답변은 무의미하며, 모든 질문에 답하거
나 모든 성경 본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슴 속에서 그 문제들을 진지하게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다.
이 책은 약혼한 커플이나 신혼부부가 함께 읽고 공부하기
에 유익하다. 또한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성과 결혼의 의미를
토론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미혼 청년
들의 경우 본 학습교재는 섹스와 결혼에 관한 정직하고 열린
대화를 자극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책이나 학습교재 자체가 변화를 가져 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 연구할 때 단지 여러분의 생각만이 아
니라 가슴을 하나님께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열린 자
세를 취할 때 이 책은 여러분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
을 것이다.도입
준비하기
이 책의 제목을 되새겨 보라.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형용사나 생각이 있는가? 이 책의 제목이 여러분에
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질
문을 일으키는가? 이 책을 쓴 의도에 대하여 특별히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무엇인가?
심화하기
1. 순결에 관한 마더 테레사의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배웠
는가? 여러분이 배운 것은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가? 순결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순결해질 수
있을까?
2.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의미 있고 변하지 않는 관계
를 찾고 있는지 그 예를 들어보라.
3.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성혁명의 '나쁜 열매'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4.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은 시대착오인가? 오늘날 그러한 삶은
사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한 것처럼 보이는가?
5. 저자는 xv쪽에서 일련의 질문들을 던진다. 이 질문들 중에
서 특별히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어떤 것인가?도전하기
1. xv쪽에서 저자는 우리가 순결을 보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안한다. 한가지 방법은 우리 주변의 기혼 부부
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한
부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들의 결혼생활을 지원할 구
체적인 방법을 보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자.
2. 그룹에서 '순결 서약'의 의미에 대해 토론해 보자. 여러분
의 그룹과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 순결의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함께 서약할 수 있을까? 다음 과로 넘어
가기에 앞서 여러분이 다같이 일치를 본 내용은 무엇인가?
제1과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준비하기
1.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이미지들을
생각해 보자. 그 이미지들을 열거해 보라. 그런 이미지들
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이미지들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인가?
2. 위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사랑, 정중함, 친절, 확신, 존경,
솔직함, 충성,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풍기는가? 그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심화하기
1. 참된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마음으로 창세기 1 장을 읽어 보
자.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는가? 인간이 맨 나중에 등장하
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인간을 나머지 피조물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창
9:4-7, 시 8, 골 3:5, 엡 4:20-24 참조)
3.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갖게 되
는가? 왜 인간의 가치는 잴 수 없을 만큼 큰가?
4.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의미를 '함께' 드
러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남자와 여자
가 서로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5.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영원(eternity)을 심어 두셨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4쪽) 이 말은 우리가 사는 방법
과 우리가 사는 목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할까?
6.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근원임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7. 저자는 우리의 양심에 대고 말하는 영원의 목소리에 대
해 언급한다. 우리의 양심은 무슨 일을 하는가? (좀더 깊
은 생각을 위하여, 다음의 질문을 숙고해 보라: 우리는 항
상 양심에 의지할 수 있는가? 어떤 것들이 우리의 양심을
모호하게 만들고, 약하게 만들고, 무디게 만드는가? (롬
2:14-16 , 삼상 2 5:26 -34, 롬 9:1, 고전 4:1-5, 8:7-
13, 고후 4:1-2, 딤전 4:2, 딛 1 :15, 히 9:14 참조))
8. 삶의 어떤 영역에서 여러분은 옳은 것과 그른 것, 선한 것
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데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는가? 그리
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9.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고 있는가? 그 외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자.
10. 당신의 운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우
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고후
3:17-18, 4:4-6, 롬 8:29 참조)
도전하기
1. 당신이 깨끗하고 잘 꾸며진 어떤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앉
아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당신이 대하기 불편한 사람
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 옆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과 그 사람의 모습이 나란히 물속에 비
칠 것이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2. 다시 예수님이 여러분 곁에 서 계시다고 상상해보자. 여러
분은 어떤 느낌을 갖겠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서
로를 예수님 -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생생한 하나님의 표
현 - 의 그림자로 보아야 한다. 당신이 불편해 하는 사람
을 찾아갔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에 걸 맞는 존경과 감사와 사랑과 경외
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의 존엄성을 더
잘 인정하기 위해 여러분 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
엇인가?
4. 저자는 다른 사람을 유용성이란 측면에서 보는 것은 그의
가치나 존엄을 경시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이 주제를 그룹
에서 함께 토론해 보라. 그리고 이런 태도가 어떤 형태로
여러분의 삶 속에 실재하는지 찾아보자. 여러분은 이런 태
도를 어떻게 경계할 수 있을까?제2장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준비하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
립시키는지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오
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혹은 어떤 벽
뒤에 숨는가?
심화하기
1. 본과의 제목을 주목하라. '좋다' 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
미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왜 그리고 어
떤 식으로 좋지 못한가?
2. 저자는 "외로움만큼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도 없
다"(9쪽)고 말한다. 외로움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리고 왜 견디기 힘든 것일까?
3.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10쪽)고 주장한다. 여러분은 저자가 이 말에서 말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사랑만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존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
유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충족
시키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요14:7-17 참
조)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있
는 공허를 채우는데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5. 창세기 2 :15-23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으로부터 남자와 여자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해 여러분은 무엇을 배웠는가?
6.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저자가
한 말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가?(13쪽) 어떤 경우 여
러분은 지나치게 한쪽 면으로 치우치는가? 여러분은 여러
분을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여러분이 한쪽으로 치우친 면
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할 수 있는가?
7.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원천이며 대상이라면, 이 사실에 근
거해서 우리는 어떤 인간 관계를 만들어야 할까? 인간 관
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관계는 어떤 목
적을 추구하는가?
8. 저자는 결혼이 인생의 최고 목표가 아니며, 그 자체로는 온
전함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13쪽). 우리 사회는 어떤
식으로 결혼에 지나친 관심을 쏟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
떤가?
도전하기
1. 순결과 공동체는 사실상 함께 간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내
적으로 소외되면 될수록 우리의 순결은 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어떻게 하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더 공동체
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즉 더 나누고 더 서로 의지하는 삶
으로 만들 수 있을까?
2. 군중 속에서조차 사람은 외로움 혹은 '홀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는 모든 사
람이 저마다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은 사람들과 서로 더 의지하며 살 수 있을까?제3과
그들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준비하기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 칭찬할만한 결혼생활을 하
는 부부를 생각해 보자. 어떤 점이 훌륭한가? 그 훌륭한 점들
을 대중 매체에서 그려지는 결혼과 비교해 보라. 결혼에 관해
서 TV, 비디오,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는 어떤 점을 강조하는
가? 무엇이 좋은 결혼을 만드는가?
심화하기
1. 저자에 따르면, 결혼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결
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2. 저자는 결혼에 대해 더 '경외심'을 가지라고 촉구한다. 당신
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결혼을 조롱하고 가치를 떨어뜨
린 적이 있었는가?
3.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이 관계는
참된 결혼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는가? (더 깊은 연구
를 위하여 출 2 :24, 6 :4-5, 신 4:31, 7:8-9, 31:1-8, 왕
상 8:23-24, 56-58, 시 89:1-8, 94:14, 11 9:89-91,
132:11 -12 , 호 2 :19-20, 마 2 8:20, 고전 1 0:13, 히
6:10-19을 참조하라.)
4. 간음이 하나님의 눈에 그렇게 끔찍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는가? 예수님은 간
음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마 5:27-30)5. 저자가 결혼이란 제도가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16 쪽)? 여러분은 다른 이유
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가?
6. 모든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16 쪽). 그는 어떤 종류의 ‘하나
됨’을 말하고 있는가?
7. 저자가 말한 내용을 근거로, 참되고 충만한 결혼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저자는 어떤 표현들을 사용했
는가?
8.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연합(unity)에는 어떤
다른 수준들이 있는가? (18쪽) 여러분의 관계는 주로 어
디에 근거하는가?
9. 결혼만이 우리의 성적인 양심(sexual conscience)의 요
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0. 하나님이 결혼의 중심에 계신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
가?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
도전하기
1. 여러분의 삶의 관계 중에서 일치와 연합이라는 하나님의
질서가 왜곡되고 무시된 경우 하나를 선택하라. 여러분
의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
자. 아마도 어떤 관계는 보다 적절한 기초 위에 세워질 때
까지 잠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 만약 여러분이 기혼자
라면 여러분의 결혼은 일치라는 하나님의 질서를 반영하
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떤 상황인가? 아마도 여
러분은 존경하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필요
가 있다.
2. 우리 문화 속에서 결혼은 계속해서 가치가 떨어지고 무시당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함께 토
론해 보자. 여러분은 ‘존중 서약’을 함께 할 수 있겠는
가? 그리고 결혼을 하찮게 만들거나 값싸게 만드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겠는가?제4과
첫 번째 범죄
준비하기
창세기 1 , 2 장을 다시 살펴보고 하나님이 원래 만드셨던
세상을 깊이 생각해 보자.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어떻게 다
른가? 그 두 세상을 서로 비교 대조해 보자.
심화하기
1. 저자는 하나님의 원래 창조하신 세상을 어떻게 묘사했는
가? 그가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2. 창세기 3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정확히 아담과 하와의
죄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 첫 번째 죄를 어떻게 묘사했는
가?
3. 그 첫 번째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
는 무엇인가?
4. 저자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 안의 하나님의 형상에 무슨 일
이 벌어졌는가?
5. 아담과 하와가 ‘거짓 사랑에 속아넘어갔다’ 라는 저자
의 말은 무슨 뜻인가?(23 쪽)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
난 적이 있는가?
6. 저자는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첫 번째 범죄는 우리들 각
자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라고 말한다(25쪽).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아
담’이나 ‘하와’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7. 우리 모두는 의심과 유혹으로 갈등한다. 예수님이 어떻게도와 주실 수 있을까? (마 4:1-11 , 히 2 :14-18, 4:14-
16 참조)
도전하기
1.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 중에서 소원해졌거나 깨져버린
관계를 생각해 보라. 그렇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라. 특
별히 여러분의 죄(교만, 불신, 고자질, 성적인 영화 관람
등)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보자. 여러분
이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을 찾아가 여러분이 저지른 잘
못에 대해 나누자.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2. 저자는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형
제 자매에게서, 이웃에게서 갈라놓지 못해 안달하고 있
다” 라고 말한다(22 쪽). 이 문제에 있어서 당신이 가장
넘어지기 쉬운 부분이 무엇인지 얘기해보자. 여러분은 어
떤 식으로 다른 사람을 의심해서 결국 갈라지게끔 하는 유
혹을 받는가? 서로 나눈 뒤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제5과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기
준비하기
1. 세상에 있는 모든 거울이 깨졌고, 모든 사람들이 심하게 깨
진 안경을 쓰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세상은 어떤 모
습일지 그려보자.
2.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당신이 아름다운 거울과 꼭 맞는 안경
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난생 처음 당신은 자
신과 다른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되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당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에
게 말하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심화하기
1. 타락 때문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잔영만이
남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
리 안에서 그의 형상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화해자’가 되시는가? (롬 5:12 -19,
엡 2 :11 -19, 골 1 :15-23 참조)
2. 예수님의 죽음은 정확히 무엇을 성취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치유하고 고쳤는가? (히
7:18-28, 9:11 -28. 엡 2 :1-11 . 골 2 :9-25. 딛 3:3-8.
참조)
3.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새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가?
(32쪽, 골 5:17, 롬 7:4-6, 빌 3:20-21 , 엡 4:20-24,
벧전 1 :3. 참조)4. 저자는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하
거나 나아질 수 없다” 라고 말한다 (29쪽). 저자는 우리
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제안하는가? (행 2 :37-
40, 롬 1 0:9-13, 요 1 :10-13, 3:1-21 . 참조)
5. 죄를 고백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요일 1 :9. 참조)
6.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 양심을 뒤흔들어 깨우시며 해방시키
신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양심에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가?
7. 저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모든 사람의 평생
과업이다” 라고 말한다 (33쪽).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하
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예수님께 가는 것과 그에게 자
신을 내어 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8.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
의 형상 자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숨는다’는 뜻이다. 골
로세서 3:1-1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도전하기
1. 자유와 화해의 시작은,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가 양심의
찔림을 고백할 때마다” 찾아온다(29쪽). 달렌의 이야기
가 보여주듯이, 죄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할 때 가장 큰 치유가 일어난다. ( 약 5:16 , 갈 5:1, 고
후 7:10. 참조) 여러분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고 여러분을
하나님과 갈라 놓는 죄들을 목회자나 신뢰하는 사람을 찾
아가 공개적으로 나눠보자.
2. 모임에 해를 입히게 된 죄의 경우에는 다 같이 있을 때 고
백해야 한다. 당신을 모임에서 분열시키고 또 분열의 정신으로 이끌고 간 문제가 있는지 잠시 시간을 갖고 깊이 생
각해 보라. 만약 있다면, 겸손한 태도와 회개하는 심령으
로 고백하자.제6과
성행위와 감각의 영역
준비하기
다음 질문들에 답하시오. 아래 세 가지 중에서 여러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느끼는 번호를 골라 적
으시오.
0 동의한다.
1 잘 모르겠다.
2 동의하지 않는다.
1. 성경은 일반적으로 섹스와 육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_____
2.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포기한다.
_____
3. 섹스 자체는 위험하다. _____
4. 섹스는 거룩한 결혼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선 안 된다. _____
5. 결혼생활은 영적인 것들에 방해가 된다. _____
6. 섹스의 기본적인 목적은 자녀를 갖는 것이다. _____
7. 정욕과 탐식은 모두 같은 범주에 속한다. _____
8. 한 사람의 성적 욕망을 통제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덕적으
로 억누르는 것이다. _____
9. 섹스에 건강하게 접근하는 데 있어 수치심을 느끼지 말아
야 한다. _____
10. 감각적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다.
_____여러분의 점수를 합산하라. 예를 들어, 질문 네 개에 대해
서 ‘동의하지 않는다’(각각 2 점), 다섯 개에 대해서 ‘동의
한다’(각각 0점), 한 개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1점) 라
고 답했다면, 여러분의 합산 점수는 9점이다. 2 0점에 가까울
수록 성과 감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성경적인 관점에 가
깝다.
심화하기
1. ‘감각의 영역’에는 정확히 무엇이 포함되는가?
2. 저자는 “감각의 영역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
다.”고 말한다 (35쪽). 저자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다음 성경 본문에서 감각의 영역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시 2 4:1, 딤전 4:1-5, 롬 1 :18-20, 롬 12 :1, 마
6:10, 마 6 :28-33, 골 4:7-18, 골 1 9:31.
4. 만일 “육체적인 것이 영의 진짜 적이 아니라면” (35쪽),
무엇인 진짜 적인가? (좀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요 2 :15-
17, 롬 6 :11 -14, 1 3:11 -14, 갈 5:13-18을 참조하라.)
5. 어떻게 감각의 영역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가까이 이끌 수
있을까?
6. 감각적인 것들 자체가 목적일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7. 성생활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의
영역에 속한 다른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8. 성적인 결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남편과 아내가 성적으로
하나가 될 때 그들 사이에 포함되는 것은 무엇일까?
도전하기1. 사도 베드로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의 됨이니
라”(벧후 2 :19)고 말한다. 여러분은 감각적인 열정 혹은
감각의 영역에서 어떤 것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2. 여러분이 특별히 연약하다고 느끼는 영역 하나를 선택하
라. 그리고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보
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자. 예를 들어, 만약 담배를 끊
으려고 한다면 그 돈을 절약하여 어떻게 다른 사람의 필요
를 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3. 오감 하나 하나를 생각해 보고 여러분이 그것으로 인해 즐
기는 선물들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그룹과 함께 하나님
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 축복을 찬양하라. 아주 아름
다운 장소를 찾아 밖으로 나가 보라. 그런 장소에서 여러
분의 생각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가?제7과
마음이 순결한 자
준비하기
많은 사람들은 ‘순결’이란 단어를 들을 때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순결하다’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과 비슷한 단어들이 떠오르는 게 있는가? 사람이 순결할
때 어떤 가치가 향상되는가?
심화하기
1. 저자는 순결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구절 혹은 용어를 사용
했는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와 닿은 것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순결은 무엇을 가져오는가?
3. ‘마음이 청결한(순결한)’자에 관하여 설명하라. 그런 순
결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4. 다음 본문들을 읽어 보라. 순결을 얻는 것에 관하여 그 본
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시 2 4:3-4, 시 51:10, 고후
6:16 , 7:1, 딛 1 :15, 딛 2 :11 -14, 요일 1 :7-9, 약 3:1-
14, 벧전 1 :22 .
5. 45쪽에서 저자는 본훼퍼의 말을 인용한다. 본훼퍼는 “ 마
음이 순결한 자는 누구인가? 오직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완전히 내어드려서 그분만이 자기 안에 계시도록 한 사람
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악은 물론이고 자신의
덕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만이 순결하고 청결한 자
들이다.” 라고 말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가?
6. 순결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결하지 않을 때 따라오
는 것은 무엇인가? 순결하지 않은 상태에 사로 잡힌 사람
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7. 순결함과 불결함의 문제는 성적인 영역에만 제한되는가?
8. 혼인증서가 순결의 보증서가 될 수 없다고 저자가 말한 이
유는 무엇인가?
9. 성적인 순결은 부부의 성적인 경험을 어떻게 깊고 강하게
만드는가?
도전하기
1. 저자는 마음이 순결한 자는 “ 영혼을 더럽히게 될 상황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다른 사람을 죄로 인도하는 것은
생각일지라도 혐오한다.” 라고 말한다(45쪽). 저자는 심
지어 음란한 생각에 마음을 뺏기는 것도 경고한다. 여러분
은 어떤가?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에 자기 자신을 빠뜨렸던 적이 있는
가? 그런 상황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라.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순결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 저자는 “교회 공동체는 소속된 모든 멤버 간에 순결한 분
위기를 만들기 위해 날마다 싸워야 할 커다란 책임이 있
다” 라고 강조한다 (46쪽). 여러분의 교회나 교제권 안
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더 성실하게 치
를 수 있는지에 관하여 토론하라. 여러분의 그룹은 어떻게
싸워야 할까? 여러분의 그룹에 침투해 들어 온 불결한 정
신이나 태도가 있는가?제8과
성령 안의 결혼
준비하기
아무리 견고한 결혼이라도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긴장과
압박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결혼의 내부와 외부로부터 어
떤 긴장이 생기는가?
부부가 이런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
인가?
심화하기
1.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서로 매력을 느끼는
가?
2.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이 결혼 관계를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저자는 ‘성령 안에서의 일치’(52쪽)에 관해 언급했는
데,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일치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이 일치는 다른 방식으로
가까워지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4. 여러분은 저자가 왜 세 가지 수준을 포함하는 결혼에 대해
언급했다고 생각하는가? (52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세
번째 전에 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5. 저자는 교회와 그 구성원의 연합의 중요성 그리고 이 연합
이 결혼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한다. 결혼의 목적과 관련해서 이 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 1 7:20-23 참조)
6 . 결혼이 성령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어떤 위험이 초래
될까?
7. 저자는 불신자 혹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는 문
제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고
전 7:12 -16 , 벧전 3:1-6 참조)
8. 저자가 성령을 강조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결혼 안에서 성
장하면서 부부는 무엇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까?
9. 다음 성경 본문들을 읽고 묵상하라. 행 2 :24-47, 4:32, 엡
4:1-3, 빌 2 :1-5, 골 3:12 -17, 롬 5:5-7. 우리가 이 본
문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결혼은 어떤 모습이
될까?
도전하기
1. 저자는 사람들마다 서로 끌리는 경험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한다. 서로의 감정,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 호감 (51쪽).
저자는 영적인 단계에 첫 번째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러분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
계를 생각해 보라 - 특별히 이성관계 - 그리고 그것의 근
거가 무엇인지 숙고해 보라. 여러분은 어떻게 그 관계가
좀더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두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2.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결혼을 했거나 약혼을 했거나 심각
한 관계에 있다면 여러분을 정말로 함께 붙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우
선 순위는 무엇인가? 서로의 감정인가? 공통된 가치관인
가? 공통된 이상인가? 호감인가? 육체적인 매력인가? 영
적인 하나됨인가? 여러분의 결혼을 영적인 근거 위에 보다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6 0
3. 그룹에서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들의 ‘질적 수
준’을 토론해 보라. 그 관계들은 하나님의 우선 순위를 반영
하고 있는가? 일상 생활에서 여러분과 다른 사람의 관계를 특
징짓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상황을 개선하기 위
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제9과
결혼의 신비
준비하기
성경이 말하는 몸과 머리 사이의 관계를 숙고해 보자.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그 둘은 어떤 방법으로 서로 의지하는
가?
심화하기
1. 저자에 따르면, 결혼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
인 이유는 무엇인가?
2. 저자가 결혼의 결속은 두 사람 사이의 약속 혹은 계약 이상
의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결속인가?
3. 만약 결혼의 결속이 교회의 신비를 반영한다면, 배우자 중
한 명이 그리스도를 떠난 경우 그 부부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충성이 한 사람의 결혼 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 결혼을 보호하는가?
5. 배우자의 죄를 동조함으로 신앙을 타협한 적이 있는가? 어
떤 경우였는가?
6.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소개한다. 각자
다른 속성과 임무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둘 다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같은가?
7.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인 차이점들을 깊이 생각해 보자.이것들은 여러분이 영적인 차이점들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8. 저자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 안에서 머리가 되고 여자는 복
종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된 리더십의 요소들
은 무엇인가? 아내들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가?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고전 7:3-5, 11 :2-26 , 벧전 3:1-7,
엡 5:21 -33, 골 3:18-21 , 딛 2 :1-5, 눅 22 ”24-27,
요 1 3:1-17 참조.)
9. 남자와 여자가 모두 어떻게 교회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까? 머리와 몸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번 숙고하라. 이와 같
은 비유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10. 저자는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를 말살한
것에 대하여 애석해 한다. 이 이슈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
떻게 생각하는가?
도전하기
1. 저자는 교회의 역할을 아주 강조한다. 여러분이 이성과 맺
는 친밀한 관계는 정말로 교회 안에 뿌리 내리고 있는가?
관계들 안에서 교회의 중요성이 더 커지기 위해서 여러분
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2. 남편들에게: 여러분은 남편으로서 여러분의 아내를 ‘범사
에 선한 것’ 안에서 인도하는데 실패한 적이 있는가? 아
내를 더 잘 섬기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아내의 솔직한 느낌을 들어보자.
3. 아내들에게: 여러분은 남편의 리더십에 저항한 적이 있는
가? 여러분은 그의 사랑에 어떻게 하면 더 순종적일 수 있
을까? 여러분의 남편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보자.
26 3
4. 저자는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
신 특별한 책임들을 회피한다고 말한다(62 쪽). 그리고 몇
가지 예들을 인용한다. 이것에 관해 좀더 토론해 보라. 이
지적이 정말 사실인지 여러분의 그룹에서 토론하라. 여러
분의 그룹에 남녀가 섞여 있다면, 이성의 멤버가 말할 때
특별히 주의하여 경청하라.
26 4
제10과
성의 신성함
준비하기
‘신성하다’는 단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사전에서 그
단어를 찾아 보라. 어떤 동의어들이 있는가? 신성한 것을 접
할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신성한 것은 일상적인 것,
세속적인 것과 어떻게 다른가? 여러분이 신성하다고 생각하
는 사물, 장소, 경험들은 무엇인가?
심화하기
1. 저자에 따르면, 성에는 두 가지 커다란 위험이 있다. 그것
들은 무엇인가? (65쪽) 이 위험 중 어느 하나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그 밖에 어떤 다른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가?
2. 어떻게 결혼 안에서조차 섹스는 위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성이 고귀한 속성을 상실하고 이기적이 될 수 있을까?
3. 부부는 어떤 조건 위에서 성적으로 결합해야만 하는가? 섹
스가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적이 되고 그분 아래 종속 될
때 부부는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까?
4. 섹스가 사람의 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인
가?
5. 부부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6. 성적인 친밀감이란 영역에서 기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기
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7. 섹스와 관련해서 남편과 아내는 일반적으로 서로에게 어떠
26 5
한 책임을 지며 어떤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가?
다음 질문들은 결혼한 부부들만 토론하라.
8. 남편과 아내는 가장 은밀한 것들조차 서로 나누어야 한다.
섹스에 관하여 여러분이 배우자와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9.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을 성적으로 만족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배우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정말고 알고
있는가? 모른다면 왜 그런가? 당신은 그것을 찾을 수 있
겠는가?
10. 당신의 성생활이 왜곡되고 불만족스럽다면 그 이유는 무
엇인가? 이것에 관해 당신의 배우자와 이야기하라. 그리고
배우자가 하는 말을 경청하라.
11 . 단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배우자를 이용했던 적이 있는
가? 당신에게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하는가?
12 . 일시적으로 성관계를 삼가 할 수 있는 어떤 좋은 이유들
이 있을까? 금욕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도전하기
1. 사실상 우리 사회는 섹스에 대한 경외감을 상실했다. 섹스
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한가지 방법은 섹스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섹스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어떤가? 여러분에게 충분한 경외감이 있는가? 여러분은
성적인 문제들을 너무 가볍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가? 여
러분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여러분이 말한 것을 책임지
는지 누가 지켜봐 줄 것인가?
2. 여러분의 그룹에 남녀가 섞여있다면 남자와 여자로 따로앉아라. 많은 측면에서 섹스는 신비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번 시간 여러분의
궁금한 점들을 함께 토론해 보라. 그룹 안에서 나눈 이야
기는 절대 비밀을 보장하라.
26 7
제11 과
부모됨과 자녀라는 선물
준비하기
모든 측면에서 자녀가 선물인 이유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열거해 보라.
심화하기
1.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상실될 위험에 처해 있는지 여러분
의 경험을 토대로 말해보자.
2. 저자는 “현대 사회는 가족을 경멸한다”고 주장한다
(73쪽). 그는 어떤 사례들을 열거했는가? 우리 사회가 가
족의 가치를 실추시키는 다른 방법들은 무엇이 있는가?
3. 저자는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서있는 어른만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적합하다” (73쪽)고 말했다. 여러분
은 이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4. 가족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할까?
5.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지는 좀더 중요한 책임에는 어떤 것
이 있는가?
6. 부모는 자녀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
을까? 어린이를 내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일
까?
7. 효과적인 훈계의 핵심 요소들은 무엇일까? 부모의 참된 권
위란 무엇일까? 저자는 부모가 자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
라 인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26 8
8. 저자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건강하지 못한 감정적 집착을
경고한다. 여러분은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는가?
9. 부모가 자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
엇일까? 부모가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0. 저자는 가혹한 육체적 처벌과 힘에 의한 조작행위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그와 관련된 사례를 들 수 있겠는가?
도전하기
부모들은 아래 질문들을 숙고하고 여러분이 어떻게 변화
될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1. 당신과 배우자는 훈계란 문제에서 일치하는가? 당신은 당
신이 기대하는 바에 대하여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를
갖고 있는가?
2.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에게서 종교적인 압력을 느끼고 있는
가? 당신은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 자녀를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틀에 아이들을 끼어 맞
추려고 하는가?
3. 여러분과 자녀 사이에 건강하지 못한 애착관계나 거짓된
의존관계가 있는가?
4. 당신 자신의 삶을 살펴보라. 당신에게 있어 가족과 자녀들
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자녀들은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가? 당신의 삶에서 자녀들을 좀더
중심에 두기 위해서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까?
5. 자녀와 좀더 의미 있는 신뢰 관계를 세우기 위해 여러분이
26 9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6. 여러분이 그룹과 함께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
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라. 파티를 열어 주거나 소풍을 간
다든지, 아니면 주일 학교에서 특별활동 시간을 만들어 보
자.제12 과
어린 시절의 순결
준비하기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
씀하신다(막 1 0:15). 어린이가 소유한 특성들에 관하여 생각
해 보라. 그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심화하기
1. 어린이는 어떻게 특별히 하나님과 가까운가? 여러분은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2.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죄로 기우는 속
성이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
엇인가?
3. 천진난만함의 분위기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은 무엇인가? 어린아이가 처한 환경 전반에 주의를 기울여
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여러분의 삶을 덮고 있는 지배적인 분위기를 한번 설명해
보자. ‘순결하지 못하거나’, ‘어린이에게 적대적인’
것은 없는가?
5. 어린아이들의 성장기에 자연 - 하나님의 창조물 - 이 중
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6. 저자는 “어린아이의 순결을 보호한다는 말은 그들이 선한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라고 말했다 (84쪽).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7. 도덕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그것이 어린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엡 6 :4, 골 2 :20-
22 , 3:21 참조.)
8. 좀더 성장한 자녀들에게 있어 무례함은 어떻게 나타나는
가?
9. 당신은 어린이들이 무리를 짓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
각하는가?
10. 어른들, 특별히 부모들은 어린이들 안에 있는 성적으로
순결하지 않은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부모가 도
덕주의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1 . 부모와 청소년 사이에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는 무엇인가?
12 . 저자는 “순결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불러일으킬 수 없
다”고 주장한다 (89쪽).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도전하기
1. 젊은이들에게: 저자는 사회적 양심을 갖는 것의 중요성과
파벌의식을 대비시킨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우리 시대의 이슈들 보다 파벌 의식 - 여러분이 속한 작
은 모임에 건강하지 못하게 몰입하는 태도 - 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
게 손을 뻗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라. 오늘
날의 중요한 이슈에 여러분은 어떻게 좀더 개입할 수 있
을까? (노숙자, 굶주림, 환경 문제, 낙태 반대 운동, 교도소 사역 등)
2. 성인과 부모들에게: 순결은 모범을 통해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다(88쪽). 당신이 부모로서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어떤 점이 아이들에게 순결함을 고무시키고 있는가?
당신은 말하고, 행동하고, 읽고, 보고, 다른 사람을 대하
고, 여가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모습 속에서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는가? 당신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가? 당신의 자녀들이
나 당신이 보살피고 있는 어린이들의 순결을 더 잘 양육하
고 보호하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구체적
으로 말해보자.
3. 신뢰는 서로 오가는 것이다. 당신이 맺고 있는 관계 중에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는 관계를 하나 떠올려보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어떻게 신뢰관계를 세
울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물어보자.제13과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준비하기
통속적인 데이트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과 생각들을 적어
보자.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데이트 풍속에는 어떤 가치관들
이 깊이 배어 있는가? 여러분은 데이트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
하는가? 아니면 이성을 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생
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심화하기
1. 이번 장 앞 부분에서 저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묵상해 보자.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할까?
2. 저자는 오늘날 젊은 남녀들이 서로 교제하는 방법에 대해
우려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통속적인 데이트 안
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3. 젊은이들이 서로 알아가는 데 있어 어떤 종류의 환경이 필
요한가? 그에 비해 여러분의 사회적 환경은 어떤가?
4. 좀더 진지한 관계는 어떤 기초 위에서 형성되어야 할까? 결
정적인 요소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5. 건강한 관계로 성장하기 위해서 부부는 어떤 것에 집중해
야 할까?
6. 두 남녀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을 때, 여유를 갖는 것과 다
른 사람들이 개입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7. 여러분은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이 부모나 다른 어
른들을 배제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8. 저자는 두 사람이 서로 알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이 방법은 어떻게 도움이 될까?
9.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에게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을
언제 알 수 있는가?
10. 결혼 전 성적 접촉이 서로 충분히 알아가는 과정에 장애
물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전하기
1.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단 둘이 사귀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면, 당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은 무
엇인가? 당신이 젊은이라면 다른 사람들 특별히 부모님을
당신의 이성관계에 어떻게 관여하게 할 수 있을까? 당신이
부모라면, 자녀들과 자녀들이 다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
에 어떻게 시간을 좀더 할애할 수 있겠는가?
2. 통속적인 데이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알 수 있는 새로
운 방법을 어떻게 보장해 줄 수 있는가? 통속적인 데이트
를 대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무엇인지 함께 토론
해 보자. 그런 대안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무엇인가?
(부모들에게: 이런 토론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젊은이들을 참
여시켜라.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라. 젊은이들에게:
부모님과 이런 대화를 하라.)제14과
봉사하는 독신의 삶
준비하기
결혼은 엄청난 선물이다. 그러나 독신 또한 축복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심화하기
1. 결혼이 우리의 가장 깊은 부르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장
깊은 부르심이라고 저자는 말하는가? 가장 큰 선물은 무
엇인가?
2. 독신때문에 외로움과 좌절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무
엇일까?
3. 평생 순결을 지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한
가?
4. 결혼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 직
면하는 특별한 위험들은 무엇인가? 미혼자들이 피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5. 당신이 미혼이라면 결혼을 기꺼이 포기 할 수 있겠는가? 그
렇게 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두려워하
는 것은 무엇인가?
6. 독신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갈등은 존
재한다. 갈등이 일어날 때 독신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7. 결혼 또한 나름대로 감당해야 할 짐들이 있다. 그 짐들이란
무엇인가? (고전 7:32-35 참조.)
8. 교회가 독신자들만이 가진 재능과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인식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의 교회는 이
것을 하고 있는가?
9. 어떻게 독신이 보다 높은 부르심이 될 수 있을까?
10. 저자는 이번 장을 맺으면서 ‘한결 같은 마음(single
heartedness)과 독신으로 봉사하는 삶’에 관해 언급한
다(111 쪽).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1 . 독신이란 선물은 결혼한 사람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도전
이 될 수 있을까? 결혼한 사람들이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잊
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전하기
1. 미혼자들에게: 당신이 평생 독신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
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가장 깊은 부르심은 분명히 그리
스도와 그분의 대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당신은 시간과 에
너지와 수입을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
하는가? 특별히 당신이 미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봉
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 기혼자들에게: 저자가 말한 것처럼, 결혼은 안락한 삶을 꾸
려가는 것이 아니다. 부부들도 또한 무조건적으로 나눠주
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당신이 미혼자들에게 좀더 지속적
으로 손을 뻗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한가지는 무엇인
가?
3. 당신의 그룹이 대부분 미혼자들로 구성되었다면 함께 교
회를 특별히 섬길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토론해보자.
어떤 실제적인 일일 수도 있고, 좀더 영적인 일이 될 수 있
을 것이다. 당신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함께 성취할 수 있
는가?제15과
하나님과 함께 아니면 하나님 없이
준비하기
결혼을 제외하고 여러분이 섹스에 관하여 배웠던 방법들
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섹스에 관한 생각을 형성해 갈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부모, 형제 자매,
교회, 친구들, 책, 음악, 광고 등) 이 사람들과 미디어는 섹스
에 관하여 어떤 태도와 메시지를 전해주었는가?
심화하기
1. 저자에 따르면 결혼은 어떻게 모욕당하고 있는가?
(11 4쪽)
2. 저자가 ‘우리 시대는 사랑 없는 시대’ 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이 말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사례
들을 인용했는가? (11 5쪽)
3. 우리 사회는 어떻게 섹스에 사로잡힌 사회가 되었는가? 저
자는 그것에 대한 어떤 사례를 들고 있는가? 여러분은 다
른 예들을 생각할 수 있는가?
4. 어떻게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망상이 되었는가?
5. 저자는 성혁명의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 말한다. 여러분은
그가 말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6. 저자가 현대 성교육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는 무엇인가? 저자가 한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
인가?
7. 여러분 자신이 학교 교실에서 경험했던 성교육을 생각해보라. 어떤 가치관과 태도가 강조되었는가?
8. 성생활에 대한 참된 교육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야 하는
가? 그리고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9. 저자는 자위행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 - 건강하고 자연스
런 일이다 - 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자위행위는 어디로 인도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어떤 손상을 입히는가?
10. 만약 여러분이 자위행위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생각해 보라. 자위행위를 한 뒤 여러분
은 만족하는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여러
분을 더 자유롭고 더 건강하고 더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
었는가?
11 . “소위 말하는 음란잡지, 자위행위, 하루 밤 즐기기, 매춘
사이의 경계선은 사실 있지도 않은 허상이다” 라는 저자
의 주장에 관해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그가 이렇게 느낀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그의 생각에 동
의하는가?
12 . 우리가 성적으로 순결하지 않은 일에 빠질 때, 저자의 말
을 빌리자면 “우리 자신을 위험 속으로 완전히 내던지는
것”이다 (121 쪽).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날까? 성적으로
순결하지 않음은 우리를 다른 어떤 일로 이끌어 갈 수 있
을까? 또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을까? (더 깊은 연구를 위
하여 마 1 5:19-20, 롬 1 3:13, 엡 5:1-6, 골 3:5-6, 고
전 5:11 , 6 :12 -20, 히 1 3:4-5 참조.)
13. 저자는 “우리 시대에는 추잡함, 무정함, 냉소주의, 진
부한 말, 무례한 언동이 팽배합니다.”라는 윌리암 버넷
(William Bennett)의 말을 인용한다 (11 7쪽). 그 사례를
들 수 있는가?도전하기
1. 여러분은 음란한 일을 즐긴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이기적
인 이유에서 자신이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허용한 적이 있
는가?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분은 신뢰하는 사
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는가? 그 사람은 누구인가? 여
러분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도와 달라고 말하겠는가? 자
유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 볼 때
얻을 수 있다.
2.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음란함에 반대하기 위해 여러분은 다
른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창한 대답을 찾지
말라. 여러분의 관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생각
해 보자.제16 과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준비하기
1. 동성애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민감하고 가장 분열
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슈이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
가? 이 문제의 쟁점은 무엇인가?
2. 동성애에 관하여 여러분이 갖고 있는 느낌과 의문점은 무
엇인가?
심화하기
1. 오늘날 동성애 문제가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저자는
왜 놀라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측면
에서 저항해야 하는가?
2. 동성애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인가? 동
성애자들을 정죄하는 것에는 정확히 어떤 문제들이 연관
되어 있는가?
3. 저자는 동성애 성향과 동성애적 행위 사이를 구별한다. 그
차이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4. 저자는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는 여러 성경 본문을 들고 있
다. 오늘날 사람들이 동성애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본문들
을 재해석하려고 어떤 시도들을 하는가?
5. 저자는 성경이 비난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오직 ‘범
죄로 간주되는’ 동성애 행위만이라는 주장이 틀렸다
고 지적한다. 다음 본문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창19:1-29, 레 1 8:22 -23, 레 2 0:13, 롬 1 :24-28, 고전
6:9-10.
6. 동성애자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워드와 앤의 이야
기는 (12 9-132쪽) 이 주제에 관하여 어떤 교훈을 가르
쳐 주는가?
7. 동성애로부터의 자유는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한가? (롬
6:1-7, 고후 5:17, 히 9:14, 벧전 4:1-6.)
도전하기
1. 저자는 "동성애가 다른 것보다 더 나쁜 죄라는 아무런 성경
적인 근거가 없다"(12 4쪽)고 말한다. 여러분은 비난의 태
도를 취하는가? 아니면 연민의 태도를 취하는가? 여러분
의 마음을 살펴 보라. 여러분은 동성애자를 그 사람이 동
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잘못 대하거나 불공정하게 대한
적이 있는가? 이런 태도를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동성
애로 갈등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라.
2. 동성애자들의 필요를 돌보는 사역 현장을 찾아 보라. 그 모
임의 지도자 한 분을 초청해서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들의
사역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라.제17과
보이지 않는 전쟁
준비하기
사람들이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하는데 끌어들이는
많은 이유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중에서 네
가지만 적어 보고 각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적어 보라.
심화하기
1.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와 최소한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는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감소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은 사실
인가? 그 말이 사실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사실이 아니라
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저자는 "우리는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134쪽)라
는 하우워즈(Hauerwas)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떤 방법으로 현실화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저자가 피임을 통해 산아 제한을 하려는 사고 방식(the
contraceptive mentality)을 염려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에 관하여 그는 어떤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가? 그리고 피
임의 이기적 사용이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고 느끼는 이
유는 무엇인가?
4. 만일 여러분이 피임을 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저자가 경고하는 내용에 비추어 여러분의 이유는
정당한가?
5. 저자는 "낙태는 살인이다. 그것에는 예외가 없다"(136쪽)
라고 주장한다. 예외가 없는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가?6. 저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 보라.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 그리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 본문
들로부터 여러분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7. 저자는 " 살 가치가 있는 삶과 살 가치가 없는 삶 사이의 구
별은 어떤 것이라도 조만 간에 삶 자체를 파괴하고 말 것
이다."(139쪽) 라는 본훼퍼의 말을 인용한다. 그런 구분
이 위험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8. 낙태를 반대한다고 항의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9. 일반 교회, 특별히 여러분의 교회는 낙태에 대한 대안을 제
공하는데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왜 성공했는가? 왜 실
패했는가?
10. 낙태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전하기
1. 성과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존엄을 좀더 고양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분
은 자연적인 가족 계획(natural family planning)이나 낙
태에 대하여 좀더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위에 여러
분이 지원할 수 있는 미혼모 보호시설이 있을지 모른다.
또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위기에 처한 엄마가 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자.
2. 여러분의 그룹이 미혼모 보호시설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지
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보라. 여러분의 그룹에서
한 명을 뽑아 가까운 곳에 있는 미혼모 보호시설과 접촉
해서 그곳 담당자와 대화해 보자. 그리고 여러분의 그룹이
함께 할 수 있는 한가지 일을 찾아보라.제18과
이혼과 재혼에 대하여
준비하기
오늘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지 생각해 보
자. 이혼하게 만드는 원인 (요소 혹은 영향)은 무엇인가? 오
늘날 사람들이 결혼을 지키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심화하기
1. 저자는 이혼과 재혼은 우리시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대답
하기 곤란한 사안'일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그 문제를
그렇게 어렵게 만드는가?
2. 저자는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는 몇 가지 이유들
을 든다. 여러분은 다른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
리스도인들은 어떤 근거에서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는 권
리를 주장하는가?
3.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가 이혼 자체
를 허용한 적이 있었는가? (신 2 4:1-4, 마 1 9:8.)
4.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혼을 허용하신다(마 5:31-32,
19:8-9).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
각하는가? 저자는 이 본문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미주
38 참조.)
5. 이혼을 위한 '정당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에
게 이혼하고 그 후에 재혼할 자유를 자동적으로 주는가?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호 3:1, 11 :1-4, 마 6 :14-15,
롬 12 :17-21 , 고전 7:10-11 , 2 9, 롬 7:3.)6. 결혼이 깨어진 후일지라도 정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7. 저자에 따르면 참된 정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음이
란 육체적인 행위 이상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8. 저자는 브루더호프의 결혼식에서 묻는 질문들을 인용한
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깊은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148쪽). 그 지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9 저자가 경고한 두 가지 함정들은 무엇인가? (150쪽) 여러
분은 어떤 함정이든 빠져본 경험이 있는가?
도전하기
1. 부부가 '평행선을 긋는 삶'을 사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만일
여러분이 결혼했다면 여러분의 부부 관계는 어떤 상황인
가? 여러분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또 필요하기 때문에
단지 공존하고 있을 뿐인가? 여러분의 결혼생활에 보다 풍
성한 열매와 활발한 상호 교류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주제를 배우자와 (단 둘이서) 토론하라. 여러분이 어떤
진전을 이룰 수 없을 경우 도움을 청하는데 동의하겠는가?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2. 어떤 과업을 함께 하기로 헌신한 그룹 안에는 커다란 힘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결혼을 지원하거나 이혼한 사람 그리
고 정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돕는 방법들을 논의
하라. 여러분의 교회 안에는 (혹은 여러분의 그룹 안에는)
부부끼리 함께 시간을 더 보내야 하지만 아이를 돌봐줄 사
람을 찾지 못한 부부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부모 중 한쪽
만 있는 경우도 유사한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들을 도
울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다양한 가능성들을 찾아
보라.제19과
그러므로 자 다 함께 깨어있자
준비하기
세례 요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다음 본문들을 묵상하라
(눅 1 :5-17, 3:4-18, 마 1 4:1-12 , 막 6 :14-29). 요한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가? 그는 무엇을 선포했는가? 그의 메
시지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심화하기
1. 저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순결과 정절을 깊이 갈망한
다"고 확신한다 (153쪽). 여러분은 이 말을 옳다고 생각
하는가?
2. 순결을 위해 진지하게 몸부림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3. 우리 시대에 만연하는 음란함 외에 또 우리가 싸워야 할 것
은 무엇이 있는가?
4. 여러분은 오늘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왜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세례 요한이 오늘날 다시 온다면
어떤 메시지를 선포할거라고 생각하는가? 그가 누구를 찾
아가리라고 생각하는가?
5. 여러분은 오늘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
하는가? 그를 지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6. 저자는 "이 짐승은 모든 국가와 모든 정부를 쥐고 흔든다.
그리고 그 짐승의 표는 우리 시대 도처에서 발견된다" 라
고 지적한다 (157쪽). 저자가 지적한 것 외에 여러분은 어
떤 증거를 더 첨가할 수 있는가?7.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삶으로 표현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까?
8.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관하여 생각해 보라 (계 1 9:7-9, 마
22 :1-14). 만약 여러분이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여러
분은 준비가 되었는가? 여러분은 언제든지 잔치에 갈 준비
가 되었는가? 그런 잔치를 위해 우리를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 저자는 "용감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끝까지 굽히지 않는 사
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56쪽). 여러분은 어
떤 사람인가? 여러분은 우리의 시대 정신에 의해 냉담해지
거나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둔해지지 않았는가?
도전하기
1. 저자는 더 많은 세례 요한이 나오길 갈망한다. 여러분은 누
구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싶은가? 오늘날 만연한
악에 대항하여 여러분이 좀더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의를 위하여 좀더
충실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
하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 여러분에게 변화되어
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2. 여러분이 그룹과 함께 나눴던 모든 내용을 되새겨 보면서
파티를 계획해 보라. 그 모임의 초점을 순결이란 주제에
맞추어라. 여러분이 함께 배웠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특
별한 방법을 생각해 보라. 그 모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
지, 어떤 내용으로 구성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각 개인
이 어떤 방법으로 기여할 것인지를 확인하라. 그룹에 속하
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미주
1. 혼외정사가 미치는 효과를 정리한 최근 자료를 찾으려면
Glenn T. Stanton이 쓴 Why Marriage Matters: Reasons
to Believe in Postmodern Society (Colorado
Springs, CO: Pinon Press, 1 977)을 읽어라.
2. Johann Christoph and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Now is Eternity (Rifton, NY:Plough, 1 976), 1 3.
3.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York: New Directions, 1 972), 1 80.
4. Eberhard Arnold, Love and Marriage in the Spirit
(Rifton, NY: Plough, 1 965), 1 02에서 인용.
5. Friedrich E.F. von Gagern, Der mensch als Bild:
Beitrage zur Anthropologie. 2 nd ed. (Frankfurt am
Main: Verlag Josef knecht, 1 955), 32.
6. Hans Meier의 Solange das Licht Brennt (Norfolk, CT:
Hutterian Brethren, 1 990), 1 7 인용.
7. Der Mensch als Bild, 33-34.
8. Dietrich Bonhoeffer, Ethics (New York: Macmillan,
1975), 1 9.
9. Der Mensch als Bild, 58.
10. Love and Marriage in the Spirit, 1 52.
11 . J. Heinrich Arnold, Discipleship (공동체 제자도, 서울:
쉴터 1 997) (Farmington, PA: Plough, 1 994), 42.
12 . Eberhard Arnold, Inner land (Rifton, NY: Plough,
1976), 55-56.
13.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Macmillan, 1 958), 95-96.
14. Cf. Peter Riedemann, Confession of Faith (1549),
(Rifton, NY: Plough, 1 974), 90.15. Discipleship (공동체 제자도), 16 0-161 .
16 . Ernst Rolffs, ed., Tertullian, der Vater des abendlandischen
Christentums: Ein Kampfer fur und gegen
die romische Kirche (Berlin: Hochweg, 1 930), 31-
32.
17. Jean Vanier, Man and Woman He made Them (New
York: Paulist, 1 994), 12 8.
18. Friedrich von Gagern, man and Woman: An Introduction
to the Mystery of Marriage (Cork, Ireland:
Mercier, 1 957), 26 -27.
19. 나는 이 주제를 나의 책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Hopeful Parenting in a Confused World (브루
더호프의 아이들, 서울: 쉴터 2 000) (Farmington, PA:
Plough, 1 997) 에서 좀더 깊이 다루었다.
20. Johann Christoph and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Thoughts About Children (Rifton, NY: Plough,
1980), 2 9.
21 . Thought About Children, 9.
22 . Discipleship (공동체 제자도), 16 9.
23. Discipleship (공동체 제자도), 1 77-178.
24. Dietrich Bonhoeffer, The Martyred Christian: 16 0
Readings (New York: Collier macmillan, 1 985), 1 70.
25. Eberhard Arnold, The Early Christians (Rifton, NY:
Plough, 1 972), 1 8.
26 . The Wall Street Journal, Dec. 1 0, 1 993.
27. Planned Parenthhood가 지도한 연구를 포함한 다른 많
은 연구들은 성교육을 받은 십대들이 그런 교육을 받지 않
은 십대들보다 성적인 활동에 가담한 비율이 50% 더 높
았다고 보고한다. 십대들의 성적인 활동에 관한 정보를더 얻고 싶으면 Center for Parent/Youth Understanding에
연락하라. 주소는 P.O. Box 414, Elizabethtown,
PA 1 7022 이고 전화번호는 (717) 361 -8429이다.
28. "한 조사는 요즘 교회들이 동거 부부들을 수용한다고 보
고한다." The Tablet, June 1 0, 1 995.
29. Thomas E. Schmidt, Straight and Narrow? Compassion
and Clarity in the Homosexuality Debate
(Downers Grove, IL: InterVersity, 1 995), 1 31-159.
30. In Straight and Narrow? (특별히 pp. 1 53-159) 저자
는 동성애 생활 방식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
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조직들을 소개한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을 알기 원하면 Schmidt의 책을 읽어 보라.
31. Eberhard Arnold, God's Revolution (Farmington,
PA: Plough, 1 992), 1 51.
32. Stanley Hauerwas, Unleashing the Scripture: Freeing
the Bible from Captivity to America (Nashville:
Abingdon, 1 993), 1 31.
33. 자연적인 가족 계획에 관하여 더 배우고 싶은 부부는 다
음 자료들이 유용할 것이다: Couple to Couple League,
P.O. Box ⅡⅡ84, Cincinnati, OH 45211 Tel: (513)
471-2000; The Ovulation Method: Natural Family
Planning, by John J. Billings, M.D. (Collegeville,
NM: The Lturgical Press, 1 987). Couple to Couple
League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녀의 터울을 만들 수 있
는 두 가지 자연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첫 번째 방법은 모
유를 먹이는 것이다. 모유를 먹이게 되면 평균적으로 수
태 능력의 회복이 일년 이상 연기된다. 이것은 "생태적 모
유 먹이기(ecological breastfeeding)"라고 부르는데, 그
렇게 부르는 이유는 자주 모유를 먹이(frequent sucking
pattern)는 생태적 모유 먹이기와 수태 능력의 회복에 거의 혹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문화적인 모유 먹이기
(Cultural breatfeeding)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Sheila
Kippley가 쓴 The Art of natural Family Planning,
CCLI, 1 996의 2 4, 2 5장을 보라. 자연적인 가족 계획의
두 번째 방법은 정기적으로 금욕을 하는 것이다. 부부는
아내의 몸에 나타나는 임신 여부 표시를 관찰한다. 그리고
임신을 피해야 할 충분히 진지한 이유가 있다면 가임 기간
동안 금욕한다."
34. Michael J. Gorman, Abortion and the early Church:
Christian, Jewish, and pagan Attitudes in the Greco-
Roman World (New York: Paulist, 1 982), 47-62 .
35. Ethics, 16 4.
36. Inner Land, 1 55.
37. Frederica Mathewes-Green, "Perspective." The
Plough 56 (Spring 1 998), 33.
38. 만일 이혼과 재혼이 절대로 정당하지 않다면, 예수님이
결혼에 불성실을 예외적으로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 5:32, 1 9:9) 더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이, 두 가지 이
유를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 당시 남편은 유대 율법
에 따라 간음한 아내와 이혼하도록 요구받았다 (e.g. 마
1:19). 그러므로 마 5:32에서 예수님은 성실하지 못한 아
내와 이혼하는 것은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모든 형태의 이혼은 죄악이며 간음이다. 마
19:9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결혼의 정절을 지키지 않는 예
외 상황은 재혼이 아니라 오직 이혼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39. 이혼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좀더 자세
한 설명을 원하면, Glenn T. Stanton이 쓴 Why Marriage
matters: Reasons to Believe in Marriage in
Postmodern Society. (Colorado Springs, CO: Pinon
Press, 1 977)을 읽어라.